“두산이 김태형 감독 취임 후 7년 만에 위기를 맞았어.”
“요즘 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현직이 듣기엔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우리끼리야 무슨 말을 못하겠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역시나 그의 근황이 나왔다.
“영감이 올해는 오히려 승격을 했대. 감독 고문이라나.”
“그뿐이겠어. 유니폼 입고 더그아웃에도 나온대.”
“장 국장, 이제 영감 기사는 그만 써.”
영웅이냐 독선이냐…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평가
그러나 야구계에서 그만큼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야신(野神·야구의 신)으로 불리며 강력한 팬덤을 보유했지만 독선, 폭압, 혹사, 벌떼, 승리지상주의 등 온갖 비난을 안고 살았다. 마치 요즘 대통령들 여론조사 결과와 흡사하다. 매우 잘하거나 못한다는 의견이 대체로 잘하거나 못한다는 의견을 압도한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옳고 그름을 따져보기보다는 서로 패거리를 나눠 좋고 싫음을 쏟아내는 패턴이다. 독자들이 참여해 만들어가는 나무위키를 보면 그야말로 방대한 사료와 일화가 나오는데 같은 사안을 두고도 상반된 의견이 혼재한다.
7개 구단 감독으로 23시즌 보내
이럴 때는 주장보다는 객관적 자료를 찾아보는 게 상책이다. 우선 김성근은 20대 중반인 1969년 마산상고 감독 취임 이후 기업은행, 충암고, 신일고까지 해임은 됐어도 쉬어본 기간은 거의 없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OB 코치에 이어 사상 최다인 7개 구단 감독으로 23시즌을 보냈다. 김응용의 24시즌(3개 구단)에 이은 2위 기록이다. 나머지 18시즌동안은 투수코치, 2군 감독이나 독립리그 고양 원더스 감독,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인스트럭터 등을 맡았다. 한 순간도 그라운드를 떠난 적이 없다. 한화 마지막 해인 2017년은 국내 최고령 감독(75세)이었다. 생소한 직책인 코치 고문에서 감독의 멘토라는 감독 고문으로 승격된 올해 역시 소프트뱅크의 정식 코치로서 일본 최고령 지도자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김성근이 처세술이 좋아서 이렇게 많은 구단의 부름을 받았을까. KIA 2군 감독까지 포함하면 김성근이 활약한 당시 9개 지역 연고 구단 중 그가 입어보지 않은 유니폼은 부산의 롯데가 유일하다.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논리로 결정된다. 그를 필요로 하니 모셔갔을 것이다.
‘김성근의 저주’?
‘마리한화’ 열풍 이끌었지만…
김성근이 지휘봉을 잡은 첫 해에 성적이 오르지 않은 팀도 유일한데 바로 삼성이다. OB는 1984년 한국시리즈엔 오르지 못했지만 전후기 통합 승률로는 1위에 올랐다. 만년 꼴찌 쌍방울은 1996년 정규시즌 2위로 점프했다. 6위였던 SK는 2007년 곧바로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컵을 안았다. LG와 한화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다. 항상 우승후보지만 독선과 폭압의 아이콘이란 김성근조차 장악하지 못한 삼성은 분명 그의 실패작이었다. 삼성은 10년이 지나 김응용이 취임한 이듬해인 2002년에야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처음 안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상대는 김성근의 LG였다.
한화를 거치면서 요즘 여론은 안티가 훨씬 많아진 것 같다. 나무위키도 비난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최소한 김성근이 이끌었던 선수들은 대부분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중엔 심각한 부상을 당했거나 2군을 들락거렸던 선수들도 있다. 사람의 평가는 조직 내부의 것이 가장 정확하다. 선수들은 그가 야구를 하는 의미를 알게 해줬다는 말을 많이 한다. 물론 김성근에 대한 악담을 하는 선수도 있긴 하다.
김성근이 감독으로 돌아오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비 오는 날 뜬금없이 생각난, 김성근에 대한 알쓸변(알고 보면 쓸데없는 변명)이었다. 안티 팬들은 부디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란다.
장환수 기자 zangpab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