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자이언트스텝’, 골든타임 놓쳐 폭 커진 것 인플레 대응 늦으면 늦을수록 부작용 커져 韓 ‘빅스텝’ 외에 개혁과 구조조정도 나서야
이지홍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얼마 전 영국 런던에서 열린 한 정책 포럼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가장 열띤 토론이 벌어진 이슈는 단연 글로벌 인플레이션이었다. 대체로 비관적인 분위기였다. 불붙은 인플레를 잡기엔 금리가 턱없이 낮고, 원가 상승에서 시작한 인플레가 이제 노동시장으로 전이돼 임금 상승과 추가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을 거란 의견이 우세했다.
한 원로 경제학자는 미국, 유럽 등 주요 통화 당국의 실기(失機)를 지적하며 그 원인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을 내놨다. 수장들이 죄다 경제학자가 아니라서 긴축의 골든타임을 놓쳤단 것이다. 그는 특히 제롬 파월 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경제 관련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유능한 관료이긴 하나 정통 경제학 트레이닝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학자였던 벤 버냉키 전 의장이 2008년 금융위기 때 했던 것처럼 신속하고 단호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봤다. 버냉키 전 의장은 금융위기 발발 직후 5.25%였던 기준금리를 0%까지 급속히 낮추며 더 큰 불황을 미연에 방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파월 의장은 법학도다.
인플레 쇼크가 닥쳤을 때 단호한 대응이 특히 어려운 건 그에 따른 정치적 부담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현대 통화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테일러 준칙’에 따르면 금리 인상 폭이 물가 상승 폭보다 커야 인플레를 잡고 경기도 차차 안정시킬 수 있다. 하지만 금리를 급격히 인상하면 이자 상환 부담이 단숨에 몇 배씩 늘어나게 된다. 정부가 나서서 실질 소득 하락에 기름을 붓는 꼴이라 경제학에 정말로 충실한 정책 수장이 아니고선 실행에 옮기기가 극히 힘든 일인 것이다.
코로나19 사태 때 과도하게 돈이 풀려 인플레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지 1년도 넘었다. 그사이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고 원자재 수급이 꼬이며 물가는 갈수록 오르고 있다. 금리 인상 폭이 물가 상승 폭에 크게 뒤처지자 미국 연준은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고려 대상이 아니라던 ‘자이언트스텝’(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을 전격 단행했다. 골든타임을 놓쳐서 전보다 더 급격한 금리 인상이 필요한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경기 침체 리스크도 함께 급등했다. 올 상반기 미국 주가는 1970년 이래 가장 많이 떨어졌다. 2%도 채 안 되는 기준금리가 한참 더 오를 거란 시장의 예측 때문이다.
유럽의 상황은 훨씬 심각하다. 두 자릿수에 육박하는 인플레가 벌써 몇 달째 계속되는데도 유럽중앙은행(ECB)은 여태까지 0% 수준의 초저금리 기조를 이어오다 이제야 긴축에 나선다고 한다. 그것도 0.25%짜리 찔끔 인상이다. 이를 두고 적절한 통화정책이라고 할 경제학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 역시 법학을 전공한 정치인이다. 유로존 국가들의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를 뛰어넘기엔 역부족으로 보인다.
물가가 치솟으니 세계 곳곳에서 임금 상승을 요구하는 파업이 줄을 잇고 있다. 정부가 어떻게든 인플레를 잡을 거라고 시장이 믿어야만 임금과 가격이 적당히 책정돼 물가 상승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 그런데 시장의 정부 신뢰도를 반영하는 ‘기대 인플레이션’은 원하는 방향과는 정반대로 움직이는 중이다. 한국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5%에 타결된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률은 이렇게 상승하는 기대 인플레에 영향을 받은 결과다. 노조들은 기세등등하고, 임금발(發) 인플레는 가시화되고 있다. 기대 인플레를 조속히 낮추지 않으면 화폐 가치가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할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
이런 고민 끝에 한국은행도 사상 첫 ‘빅스텝’(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을 단행했다. 이번 위기는 생산 원가를 뒤흔든 구조적 쇼크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개혁과 구조조정을 통한 펀더멘털 개선 외엔 딱히 답이 없다. 통화정책에 물가도 잡고 경기도 부양하는 만병통치약을 기대해선 안 된다. 중앙은행의 첫 번째 책무는 화폐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지키는 것이다.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장기적 안목과 원칙에 충실해야 더 큰 위기를 막을 수 있다. 갈 길이 멀다.
이지홍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