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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만남과 장례식장에서의 만남[삶의 재발견/김범석]

입력 | 2022-07-15 03:00:00

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


사적인 인맥 네트워크가 중요한 우리나라에서 장례식은 독특한 위상을 갖는다. 본디 고인의 사망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자리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고인과의 친분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부고를 듣고 얼마나 빨리 오느냐, 부의금을 얼마나 많이 내느냐, 장례식장에 얼마나 오래 머무느냐가 평소 고인과 친분의 척도가 된다. 하지만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좀 다르다. 장례식장에서 얼마나 잘하느냐보다 임종 전에 얼마나 잘하느냐가 고인과의 친분을 가늠하는 척도다.

직업적 특성상 임종 한 달 전의 병실 모습과 장례식장 모습을 동시에 볼 기회가 있다. 장례식장에도 빨리 오고 오래 머물다 가지만 정작 고인이 살아 있을 때는 한 번도 오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다. 이런 분들은 장례식장에서 무척 아쉬워하고 슬퍼한다. 고인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었는지, 고인과 본인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했었는지 말하며, 장례식장 분위기를 주도하기도 한다.

반면 임종 전에 병문안도 자주 오고, 환자의 가족과 교대로 병간호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이 아니지만 가족처럼 환자의 투병 생활을 돕는다. 이런 분들은 장례식장에서 별말 없이 조용히 있다. 자신이 고인과 얼마나 친분이 있었는지, 고인의 임종 전에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병간호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문상객이 오면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짐작하기로 이들 역시 무척 슬프지만 고인에게 여한 없이 했기 때문에 후회가 남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고인이 살아 있을 때 잘해야지 죽고 나서 장례식장에서 잘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살아 있을 때 얼굴을 봐야지 죽고 난 뒤 영정을 열심히 본들 무엇 하겠는가. 하지만 많은 사람이 고인이 살아 있을 때 잘하기보다 장례식장에서 아쉬워하는 편을 택한다.

요즘은 집에서 임종을 맞는 사람이 별로 없고 대부분 병원 침대에서 숨을 거둔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병원에서 거동이 어려워지면 누군가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상대방에게 병원으로 오라고 하기도 미안하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연락 한번 못 하고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눈을 감는다. 이런 때 그 사람이 와준다면, 전화라도 한 통 해준다면 무척 고마운 일이다.

마지막 순간은 시간 맞춰 다가오는데, 우리는 그것을 모른 채 임종을 전해 듣고 나서야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몰랐다’ ‘좋은 분이었는데 하늘도 무심하지’ ‘인생이 허무하다’라고 말한다. 상대가 당연히 살아 있을 것으로 생각해 만남을 훗날로 미룬다. 시간은 절대 기다려주지 않는데도. 그러니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죽음을 아쉬워하기보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잘해주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