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복합위기’ 현장을 가다] 해외 도피 대통령은 ‘이메일 사임’ 現총리는 대선 출마… 분노 확산
스리랑카 총리 공관 순찰… 마트 일부 매대 텅 비어 16일(현지 시간) 스리랑카 최대 도시 콜롬보의 총리 공관 앞을 군인들이 순찰하며 지나고 있다. 반정부 시위대가 15일 대통령의 사임계 제출 뒤 일단 물러난 다음 군인들이 주변에 배치됐다(위쪽 사진). 경제난으로 인한 공급 부족에 16일 콜롬보 도심 마트의 목욕용품을 진열한 선반 일부가 텅 비어 있다(아래쪽 사진). 콜롬보=황성호 특파원 hsh0330@donga.com
콜롬보=황성호 특파원
“해외로 도망친 고타바야 라자팍사 전 대통령은 도둑놈이에요.” 15일(현지 시간) 스리랑카 최대 도시 콜롬보의 대통령궁 인근에서 만난 택시 운전사 비지타난다 씨(47)는 “현재 스리랑카에는 기름도, 옷도, 먹을 것도, 아무것도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라자팍사 전 대통령은 5월 국가부도 이후 날로 심각해지는 경제난에 반정부 시위대가 9일 대통령궁을 점거하자 13일 몰디브를 거쳐 싱가포르로 달아났다. 15일 이메일로 의회에 사임계를 보냈다. 대통령궁을 노려보는 비지타난다 씨의 표정에 집권세력에 대한 분노가 드러났다. 집권당이 대통령 권한대행인 라닐 위크레마싱헤 총리를 20일 치르는 대선 후보로 지명하자 시민들의 분노는 다시 커지고 있다.
“경제난 책임 現총리, 대선 출마 안돼” 스리랑카 반정부 시위대 다시 분노
‘국가부도’ 스리랑카 르포
해외 도피 대통령, 실정 인정 않고 총리까지 민심 거슬러 대통령될땐
대규모 반정부 시위 다시 점화될듯
“회사에 기름없어 아무도 일 못해” 달러 벌수 있는 관광업 고사 상태
투잡 경찰관 “한국 가게 도와달라”
“라닐 위크레마싱헤 총리는 고타바야 라자팍사 전 대통령의 부패에 가담했어요. 그는 ‘또 다른 라자팍사’일 뿐입니다.”
17일(현지 시간) 기자와 만난 콜롬보 시민 다니카 씨(25)는 라닐 위크레마싱헤 총리가 20일 대선에서 여당 후보로 나선다는 소식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반정부 시위대는 대통령궁 점거를 푼 상태다. 라자팍사 전 대통령이 이메일로 의회에 사임계를 낸 15일 밤 일부 시위대는 대통령궁에서 대통령 축출을 기념하듯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췄다. 프랑스 주재 스리랑카대사관 측은 “프랑스 혁명이 스리랑카에서 다시 이뤄졌다”고 했다.
하지만 경제난에 함께 책임이 있는 위크레마싱헤 총리가 대선 후보로 지명되자 시민들의 분노는 다시 들끓고 있다. 반정부 시위대는 라자팍사 전 대통령이 해외로 도피하기 전 대통령궁을 점거했을 뿐 아니라 총리 관저도 불태웠다.
○ “우리가 끌어내리기 전에 총리도 물러나야”
현지에선 위크레마싱헤 총리가 의회에서 치르는 간접선거에서 민심을 거슬러 대통령에 오르면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다시 불붙을 것으로 보고 있다. 17일 대통령궁 앞의 시위대 일부는 ‘라닐, 고 홈(Ranil, Go Home·라닐은 집으로 가라)’이라고 적힌 머리띠를 매고 있었다. 이름을 밝히길 거부한 한 시민은 “우리가 라닐을 끌어내리기 전에 그가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고 했다.
이번 반정부 시위의 대표 구호는 라자팍사 전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고타, 고 홈’이었다. 라자팍사 전 대통령 등 15년 동안 스리랑카를 지배한 라자팍사 가문에 대한 스리랑카 국민들의 분노가 드러난 것이다. 대통령궁 인근 곳곳에는 라자팍사 가문 사람을 비판하며 그들의 얼굴을 붙여 놓은 현수막이 있었다.
부패와 실정(失政)으로 글로벌 복합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국가부도까지 맞았지만 나라를 버린 라자팍사 전 대통령은 마지막까지 잘못을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았다. 그는 사임계를 제출하면서 “스리랑카의 금융 위기는 취임 수년 전부터 누적된 경제 실정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 “시위 멈추면 권력자들이 나라 망칠 것”
“지금 회사 전체에 기름이 전혀 없어 아무도 일할 수가 없습니다. 차량을 움직일 수가 없어요.”가이드 10명 규모의 관광회사에서 일하는 사시카 씨(43)는 “지난달만 해도 기름을 어렵게나마 구할 수 있어 영업을 했다”며 이렇게 호소했다. 라자팍사 전 대통령이 해외로 달아났지만 스리랑카 국민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경제난은 더욱 악화하고 있다.
극심한 석유 부족으로 스리랑카가 자체적으로 달러를 벌 수 있는 관광업은 고사 상태다. 스리랑카 당국에 따르면 5월 국가부도 전인 3월 10만6500명이던 외국인 관광객은 6월 30.8% 수준인 3만2856명으로 급감했다.
이날 콜롬보 도심에서 만난 택시 기사 프리마틸라카(가명·52) 씨는 국가부도 전의 2배 요금을 요구했다. 그는 “암시장에서 1L에 450루피 하던 기름이 1500루피(약 5500원)까지 뛰어서 어쩔 수 없다”며 미안해했다. 택시 기사로 ‘투잡’을 뛰는 그는 원래 직업 경찰관이라고 했다. 경찰 신분증을 보여준 그는 “최근엔 일을 두 개 해도 먹고살 수가 없다. 혹시 한국에 일자리가 없느냐. 한국으로 갈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하소연했다.
스리랑카 최대 도시 중심가 도로에는 차량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날 찾은 콜롬보 도심의 마트에는 일부 매대가 텅텅 비어 있었다. 마트 직원은 “휴지, 보디워시 같은 제품은 없어진 지 몇 달 됐다”고 전했다. 지난달 27일 경제난을 견디지 못해 배를 타고 스리랑카를 탈출한 71세 여성은 인도 해안가에서 탈수 증세를 보이다 끝내 숨졌다.
콜롬보=황성호 특파원 hsh033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