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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내서 돈 풀자던 사람들 어디 숨었나[특파원칼럼/김현수]

입력 | 2022-07-19 03:00:00

“부채로 경기 부양이 뉴노멀”이라던 美
뼈아픈 ‘정부 실패’에 세계가 몸살 앓아



김현수 뉴욕 특파원


TV를 켜도, 신문을 펼쳐도 온통 ‘9.1%’라는 숫자로 난리였다. 13일(현지 시간) 발표된 6월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예상을 뛰어넘어 9% 선도 뚫리자 미 경제가 충격에 빠졌다.

뉴스를 보지 않아도 고물가는 피부로 느껴진다. 외식은 사치재가 돼 엄두도 못 낸다. 뉴욕에선 월세가 40%가량 치솟아 ‘강제 이사’당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원래도 빠듯한 주머니 사정에 기대어 살던 취약 계층은 작은 충격에 와르르 무너진다.

국가도 그렇다. 원래도 빠듯했던 국가들이 미국 기침 한 번에 몸살을 앓는다. 20년 만에 ‘슈퍼 달러’ 수준으로 달러 가치가 올라 한국 인도 대만 3개국 주식시장에서 올 들어 800억 달러(약 105조 원)가 빠져나갔다. 대체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또 겪어야 하는지…. ‘돈 풀자 했던 사람들, 다 나오라 그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교수 생각이 났다. 크루그먼 교수는 2020년 3월 뉴욕타임스(NYT)에 솔깃한 칼럼을 실었다. 정부가 국내총생산(GDP)의 2%가량 빚을 내 공적 투자로 경기를 부양하자는 내용이었다. 빚은 갚지 않아도 된다! 미국 기준금리가 0% 수준이고 이것이 ‘뉴노멀(새로운 정상)’이기 때문에 경제성장률이 금리보다 높은 한 정부가 계속해서 돈을 빌려 써도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영구적 경기 부양(Permanent Stimulus)’으로 불렀다.

이제 와 보면 황당하지만 그때는 일리가 있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12년간 이어지던 저금리 세상이 영원할 것 같았다. 당시 문제는 저성장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덮쳤을 때 이미 제로 금리여서 통화정책으로 경기를 부양하기엔 한계가 있었고 정부의 경기 부양책은 절실해 보였다.

크루그먼 교수의 제안은 1년 뒤 현실이 됐다. 이듬해 취임한 조 바이든 행정부는 곧바로 1조9000억 달러(약 2498조 원) 규모 부양책을 내놨다. 미국과 전 세계가 경기 부양에 나서니 주가는 오르고 사람들은 뉴노멀을 믿고 싶어졌다. 급기야 “기축통화국 정부는 화폐를 계속 발행해 경기를 부양해도 된다”는 현대화폐이론(MMT)까지 등장해 주목받았다. 올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1년 전부터 인플레이션 우려가 있었지만 일반 투자자도, 미 정부도, 심지어 미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도 ‘일시적 현상’이라며 일축했다.

그 결과 41년 만의 고물가, 20년 만의 슈퍼 달러, 28년 만의 자이언트스텝(0.75%포인트 금리 인상)이 세계를 괴롭히고 있다. 크루그먼 교수나 바이든 행정부는 “인플레이션은 과도한 확장적 재정정책 때문이 아니라 공급 병목 탓이 크다”며 “인플레이션은 통제 불가능하지 않다. 과도한 공포가 더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래를 낙관하기엔 가장 취약한 계층, 취약한 국가가 무너지고 있다. 선진국 유럽과 일본의 미래마저 불안해졌다.

저명한 경제학자 존 코크런 미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교수는 “희망적 사고는 끝내야 한다”며 현재 인플레이션을 ‘재정 인플레이션’으로 규정한다. 현재 위기는 ‘정부 실패’를 가리킨다는 의미다. 14년 전 금융위기를 부른 ‘시장 실패’의 반작용으로 생긴 ‘큰 정부’에 대한 믿음이 세계 경제를 어둡게 만든 셈이다. 경제는 믿음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을 또다시 큰 대가를 치르고 배우게 될 판이다.



김현수 뉴욕 특파원 kim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