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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裸耕)’의 모습 담은 2300년 전 청동기 그림[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입력 | 2022-07-19 03:00:00

선사시대 곡물의 흔적은 한반도에서 일찍이 농경문화가 시작됐음을 보여준다. 2300년 전 한반도 마을 풍경을 보여주는 청동기의 뒷면(보물 1823호·큰 사진)과 이를 확대한 사진. 벌거벗고 밭갈이 하는 남성의 모습은 ‘나경’의 풍습을 짐작하게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인류는 지구상에 처음 등장했을 때 신체적으로 나약했으나 탁월한 인지능력을 지녔기에 멸종을 피했다. 불을 이용하고 도구를 만들어 쓰면서 차츰 두각을 나타냈지만 먹거리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아 계절별로 여기저기 떠돌며 살았다.

그러다가 농경을 시작하면서 드디어 정착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는 이를 ‘신석기 혁명’이라 불렀다. 농경을 바탕으로 인류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혁명적 발전을 이루었음을 강조한 말이다. 농경은 인류를 야만에서 건져 문명으로 이끈 견인차라 할 수 있다.

한반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신석기시대에 농경이 시작됐고, 그것이 본격화하는 청동기시대에는 마을 규모가 커지고 사회 분화가 진전됐다. 근래 각지에서 선사시대 농경의 흔적들이 속속 발굴되면서 문명 탄생의 과정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고물상이 수집한 ‘농경 유물’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은 깨진 청동기 한 점을 구입했다. 유물을 판 상인에게 청동기의 이력을 물었더니 지난해 말 대전의 한 고물상이 수집한 것이라고 했다. 박물관 연구원들은 처음에는 대전 괴정동 출토 방패형동기와 비슷하였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녹을 제거한 후 빼곡히 무늬가 새겨져 있음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맨 위에는 어디엔가 매달아 사용한 듯 6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앞면에는 둥근 고리 하나가 걸려 있는데, 간혹 발굴되는 청동의기처럼 살짝 들었다 내려놓아 소리를 내는 용도로 보인다. 고리 위쪽에는 나뭇가지에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마치 시골 마을 어귀의 솟대와 비슷하다.

뒷면에는 더 다양한 그림이 있다. 오른쪽 위에는 간략한 선으로 표현된 인물이 있는데, 남근이 드러난 것으로 보면 벌거벗은 채 밭갈이하는 남성으로 보인다. 왜 벌거벗고 밭을 가는 걸까. 학계에선 나경(裸耕)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는 입춘 때 벌거벗고 밭은 가는 풍습으로, 조선의 일부 지역에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그 아래에는 개간 작업 중인 남성이, 왼쪽 위에는 여성으로 보이는 인물이 무엇인가를 수확해 항아리에 담는 듯한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비록 많은 부분이 파손된 데다가 발굴품이 아니라는 한계가 있지만, 이 청동기는 2300년 전 한반도의 ‘마을 풍경’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인정받았다.

불탄 집터서 찾은 탄화미 395g

경북 안동시 저전리의 저수지 바닥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의 벼 껍질. 펄층에 파묻힌 덕에 수천 년간 원형을 보존할 수 있었다. 동양대박물관 제공 

1975년 국립박물관 조사단은 농지확대개발사업지구에 편입된 충남 부여 송국리 일대를 발굴해 청동기시대 집터와 옹관묘 등을 확인했고 1978년까지 연차적으로 조사를 이어갔다. 1977년 11월에 진행한 54지구 1호 집터 발굴에서는 예상치 못한 성과를 거두었다. 경작이 끝난 밭의 겉흙을 걷어내자 장방형 집터의 윤곽이 나타났고 내부를 파들어 가자 화재로 폐기된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지푸라기와 나무로 만든 움집에 불이 났을 때 가재도구조차 챙기지 못한 채 몸만 피한 듯 집터 바닥에는 토기와 석기가 널려 있었다.

조심스레 토기를 노출하던 조사원의 눈에 거뭇거뭇한 숯 조각들이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불에 탄 쌀이었다. 처음에는 한 알씩 수습하다가 너무 많아 통째로 떠서 물체질했더니 수백 알이나 됐고 무게는 395g이었다. 서울대 농대에 분석을 의뢰한 결과, 모두 길이가 짧은 자포니카형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2년 전 서울대 박물관이 경기 여주 흔암리 집터를 발굴할 때 수습한 수십 점의 탄화미와 더불어 청동기시대에 벼농사를 지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 학계에서는 한반도의 벼농사가 일본에서 전해졌을 가능성을 타진하였지만, 두 유적에서 탄화미가 발굴되면서 일본 야요이 시대 도작문화의 기원지가 한반도였음이 새롭게 밝혀졌다.

또한 1990년대 이후 선사시대의 논과 밭이 차례로 발굴되었다. 논은 규모가 작은 점이 특징이었고, 밭은 이랑과 고랑을 갖추고 있었다. 경작지에서는 다양한 곡물이 수습되어 선사시대 농경에 대한 이해가 획기적으로 진전됐다.

펄 속에 잠자던 청동기시대 유물

2005년 3월, 필자는 동양대 박물관 연구원들과 함께 경북 안동 저전리에서 국도 확장공사 구간에 포함된 청동기시대 선돌 발굴에 나섰다. 그런데 발굴 결과 선돌은 조선시대에 옮겨진 것으로 밝혀져 자칫 아무런 소득 없이 발굴이 끝날 수 있는 상황을 맞았다.

혹시나 싶어 조사 구역에 깊은 도랑을 팠더니 그곳에서 확인된 펄층에서 큼지막한 나무토막과 함께 여러 점의 청동기시대 토기 조각이 드러났다. 추가 조사에서 유적의 분포 범위가 넓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발굴은 2008년까지 이어졌다. 그사이 저수시설과 수로 등 청동기시대의 수리시설이 전모를 드러냈고 유적 곳곳에서 다량의 석기, 토기, 목기가 쏟아졌다. 저수시설은 자연 수로를 확장하여 만든 것으로 너비 17m, 길이 50m, 잔존 깊이 1.8m 규모였다.

유물 가운데 2점의 절굿공이는 청동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첫 사례였기에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발굴 막바지에 저수시설 바닥에서 벼 껍질 몇 개가 발견된 것을 계기로 3개월 동안 저수지 바닥에 퇴적된 흙 전체를 물체질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600개 이상의 벼 껍질을 수습했다. 이처럼 벼 껍질과 절굿공이가 원형을 갖춘 채 잘 남아 있었던 것은 저수시설과 수로에 퇴적된 펄 때문이다. 일정한 습도를 유지한 펄이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유기물을 안전하게 품어준 것이다.

지난 50여 년 동안 선사시대 농경의 실체가 상당 부분 해명됐다.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농사를 지어 먹거리를 마련했는지, 농경이 불러온 사회 변화로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근래 전국 곳곳에서 청동기시대의 마을이 발굴되고 있는데, 그 수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그것이 바로 ‘농경의 힘’이고 사회 변화의 동력이었을 것이다. 장차 더 많은 논과 밭, 수리시설, 그리고 곡물이 발굴되어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이 더욱 선명하게 밝혀지길 바란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