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5월 국회 첫 시정연설에서 처칠과 애틀리의 파트너십을 말했을 때, ‘윤석열의 처칠 스타일’이라는 도발을 썼다. 성격 좀 급한 분들은 ‘처칠’만 보고는 냅다 아래로 내려가 “비교할 걸 비교하라”고 댓글을 달기도 했던 칼럼이다.
눈 밝은 독자들은 알아봤겠지만 그 글엔 뒤로 갈수록 의미심장한 내용이 나온다. 둘 다 예쁜 아내, 불굴의 의지를 지녔다는 것보다 결정적 공통점은 과히 호감 받지 못하면서, 평소라면 가능성이 없었는데도, 시대적 상황에 의해 리더가 됐다는 거였다.
▶관련 기사 [김순덕의 도발]윤석열의 ‘처칠 스타일’
https://www.donga.com/news/dobal/article/all/20220522/113549648/1
출근하는 윤석열 대통령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동아일보 DB
● 대성공 이후 대실패 할 수도
우리에게 희망적인 것은 처칠 같은 최극단 리더 중에 최고의 리더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위기 때 정상적 검증이나 여과과정을 거치지 않고 나라를 맡았지만 결국 나라를 구해낸다는 거다(가우탐 무쿤다 ‘인디스펜서블’). 하지만 검증을 건너뛰는 바람에 발견 못했던 바로 그 점으로 인해 크게 실패할 공산도 크다. 윤 대통령의 처칠 스타일이 재미있고, 또 겁나는 건 이 때문이다…라고 나는 글을 마쳤다.
그때 차마 못 썼던 대목이…이런 최극단 리더는 대성공 이후 대대적 실패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사실이었다. 처칠 역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에 이끌고도 영국 총선에서 패배했다. 우씨. 윤 대통령도 대선 ‘승리’ 이후 이렇게 빨리 지지율이 빠질 줄 그땐 정말 몰랐었다.
● 시대가 먼저냐, 인물이 먼저냐
애프터서비스 차원에서 처칠을 다시 쓰자면,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2014년에 쓴 ‘처칠 팩터(The Churchill Factor)’란 책이 있다. 존슨은 코로나 봉쇄 중이던 2020년 5월과 6월 생일파티를 한답시고(진짜 생일은 6월19일) 손님들을 대거 초대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벌금형을 받는 등 물의를 빚다 8일 사의를 밝혔다. 그 책을 쓸 때만 해도 “나는 처칠의 신발 끈은커녕 훌륭한 전기를 펴낸 로이 젠킨스의 신발 끈조차 풀 자격이 없는 정치인”이라며 나름 겸손했다. 시대가 인물을 만드는지, 인물이 시대를 만드는지 따지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란다. 마르크스는 “지도자는 중요하지 않다. 인류는 스스로 역사를 창조한다”고 주장했지만 존슨은 그 반대인 셈이다(에고, 그렇게 잘 알면 좀 잘할 것이지).
1945년 독일 포츠담에서 모인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와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대원수. 동아일보 DB
● 국민성과 비슷한 리더의 성격
‘처칠 팩터’는 “성격이 운명이라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말에 나도 동의한다”는 서문으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처칠이 그토록 어마어마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요인을 파고든다. 처칠의 성격부터 짚자면, 같은 토리당 의원조차 그를 허풍쟁이·이기주의자·깡패·망나니·영락없는 술꾼으로 여겼다. 처칠을 탁월한 인물로 봤던 사람들도 그가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대중의 감정을 잘못 읽고 행동한다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남성우월주의자, 인종 차별주의자였던 건 물론이다.
그렇게 치면 윤 대통령도 조금은 비슷하지 않나 싶다. 무례하지만 전통적이고 한결 같지만 감상적이기도 하다는 점 등은 한국 꼰대의 특징 아니던가.
● 위대한 리더는 잘못을 인정한다
존슨은 15세 무렵 한 심리학자의 글에서 “처칠이 달성한 가장 크고 중요한 승리는 자기 자신을 이긴 것”이라는 대목을 봤다고 썼다. 어릴 적 말을 더듬었던 처칠은 이를 고치려고 자신이 존경하는(그러나 사랑은 받지 못한) 아버지의 연설을 통째로 암기했다. ‘고대로마의 민요’에 실린 시 1200편을 암송하기도 했다. 2018년 국내에서 ‘처칠 팩터’를 펴낸 지식향연 기획위원은 “처칠은 결점도 많았다. 말실수가 많았고…그럼에도 그가 위대한 리더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 결정을 밀어붙이는 추진력,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 자유에 대한 신념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소개했다.
윤 대통령은 1월 초 대선 후보 때 26%까지 지지율이 추락한 적이 있다(갤럽). 국민의힘 후보로 확정된 2021년 11월 중순 42%로 치솟았던 지지율이 12월 초 36%→중순 35%로 빠지자 정권교체를 원하는 지지층이 오히려 애면글면했다. 당 대표 이준석은 윤핵관을 거론하며 뛰쳐나갔고, 후보는 배우자의 이력 문제가 대수롭지 않은 듯 화를 버럭 내던 때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7월5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로 출근하며 인사 부실검증에 대한 취재진 질문에 “전정권에서 그렇게 훌륭한 사람 봤나”며 강하게 답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 자신감과 겸손함을 한 몸에 통합한 리더
떨어진 지지율이 돌아온 건 처칠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칠이 런던지하철을 타고 시민의 의견을 묻는 영화 ‘다키스트 아워’를 떠올린 윤 후보가 1월 6일 여의도역 앞에서 출근길 인사를 하는 등 ‘태도’를 바꿨던 거다. 때맞춰 돌아온 이준석도 후보와 원팀을 선언하자 다음주부터 지지율이 31%→33%→37%→41% 쑥쑥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48.56% 득표율로 윤석열 대통령이 탄생했다. 검찰총장 시절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국민을 매료시켰던 윤석열의 카리스마를 아직도 많은 이들이 기억한다. 리더십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런 최극단의 지도자는 위험 감수를 통해 성공했고, 그래서 지나친 낙관에 빠져 남들이 말려도 자신의 뜻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권력자에게 최대의 적은 성공 그 자체라고 하던가. 위대한 지도자는 자신감과 겸손함이란 상반된 자질을 한 몸에 갖춘 지도자라고 했다. 특히 잃을 것이 많은 상황에선 조언자의 판단을 따르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실수를 인정하는 겸허함이 사태를 헤쳐 나가는 결단력과 짝을 이룰 때, 운 좋은 지도자에서 위대한 지도자가 탄생한다는 거다.
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하면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 ‘윤석열 팩터’로 세상을 바꿀 수 없나
윤 대통령이 위대한 지도자가 되면 참 좋겠지만 죽어도(아니 적어도) 실패한 대통령은 되지 말았으면 한다. 열심히만 해서는 민심을 돌리기 어렵다. 야당 지도부를 초청하든, 인사 쇄신을 하든, 아니면 이준석을 받아들이든, 대통령이 달라져야 ‘윤석열 팩터’가 생겨나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어떻게 해낸 정권교체인데 자존심 상해 못 살겠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