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창업자 첫 정신건강 실태 조사
국내 한 스타트업 대표 A 씨는 7년 전 오프라인 사업을 온라인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공황장애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다. 당시 사업이 번창할수록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커져갔다. 직원들에게는 권위적인 리더로 군림했다. 사업 규모를 키우면서 대인관계에서 상처받는 일도 늘어갔다.
그는 자신의 공황장애 사실이 투자 유치에 부정적 요소로 작용할까 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다가 병원을 찾았다. 2년여 동안 약을 복용하는 한편으로 리더십과 경영 코칭을 받아 증상이 개선됐다. 그는 “명상과 요가 등을 통해 끊임없이 마음을 관리하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20일 은행권청년창업재단 디캠프와 분당서울대병원이 발간한 ‘스타트업 창업자 정신건강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창업가의 정신건강 상태는 모든 지표에서 낙제점이었다. 일반 성인보다 우울, 불안, 자살의 유병률이 높았다. 이번 보고서는 국내 스타트업 창업자 27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분석한 것이다. 국내 창업자를 대상으로 한 정신건강 실태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창업자들은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으로 ‘자금 압박 및 투자 유치’(44.6%)를 꼽았다. 이어 △조직 관리 및 인간관계(20.3%) △실적 부진 및 성과 미흡(19.6%) 순으로 나타났다.
창업자 가운데선 여성 창업자가 남성 창업자에 비해 자살 위험성과 스트레스 수준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 창업자의 자살 위험성은 34.1%, 중증도 이상의 스트레스 비율은 68.2%인 반면에 남성 창업자는 각각 18.5%, 57%였다. 또 여성 창업자는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역기능적 대처’를 남성 창업자에 비해 더 많이 사용했다. 역기능적 대처란 스트레스와 관련없는 행동을 해 스트레스를 회피하는 것을 뜻한다. 연구진은 “역기능적 대처를 자주 사용하면 과음 등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다”며 “여성 창업자를 대상으로 스트레스 대처를 위한 심리 교육 및 프로그램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문제가 심각한데도 창업자들은 정신건강과 관련된 전문적 도움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었다. 현재 도움을 받지 않고 있는 254명을 조사한 결과 가장 큰 이유로 ‘어려움이 있지만 도움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46.9%)가 꼽혔다. 이어 △치료 시간을 내기 어렵다(39.8%) △높은 비용(33.9%) △어디서 도움을 구할 수 있는지 모름(13.8%) 순으로 나타났다. ‘나약한 사람으로 비칠까 염려된다’(10.2%)거나 ‘사회나 직장에서 받을 불이익’(5.1%) 등 낙인 효과를 우려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번 연구의 책임자인 김정현 분당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스타트업 창업자들의 정신건강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기업의 운영에도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이라며 “창업자들이 자신의 정신건강 상태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언제든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심리교육 기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하경 기자 whats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