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 이후 빈번해진 일본의 정치테러는 1930년대 정치·경제의 혼란상을 틈타 극심해졌다. 극우 장교들이 주축이 된 혈맹단은 정재계 주요 인사들의 암살을 시행했다. 일부 해군 장교들은 1932년 5월엔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의 관저에 난입해 총리를 살해했다. 재판을 받는 혈맹단원들(왼쪽 사진)과 피살된 이누카이 총리.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암살당하자 그의 지인 중 한 사람이 “억울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지만 다다미가 아닌 정치 연설 현장에서 최후를 맞은 게 ‘뼛속까지 정치인’인 아베다운 죽음이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는 언론 보도를 봤다.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에게 사살되었을 때, 그의 라이벌이었던 오쿠마 시게노부(大외重信)는 얼마나 멋진 죽음이냐며 자신은 다다미 위에서 죽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한다. 일본에서는 총 쏘는 사람도, 총 맞은 사람도 ‘가오(かお·체면)’를 챙긴다. 》
교토, 한때 ‘테러리스트의 천국’
1930년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의 절정기에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총리가 도쿄 역에서 총격을 받았다(10개월 후 사망). 범인은 우익 청년. 하마구치 내각이 런던의 해군군축회담에서 미영의 우위를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한 직후였다. 군부와 우파는 이를 통수권간범(統帥權干犯)이라고 공격했다. 대일본제국 헌법에 따르면 국군통수권은 천황에게 있는데, 정부가 천황의 의사와 상관없이 멋대로 병력에 관한 문제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당시 히로히토 천황도 이 조약을 지지했고, 외국과의 조약은 군부가 아니라 정부가 담당하는 것이므로 말이 안 되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후 다이쇼 데모크라시하에서 정착된 정당내각을 폭력으로 타도하려는 움직임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일본의 테러 역사를 살펴보자. 1853년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가 개국을 요구하자 일본사회에는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특히 그간 정치 참여의 기회를 얻지 못하던 하급 사무라이들이 위기를 과장·선동하며 정치개혁을 부르짖었다. 그것이 막히자 테러가 빈발하기 시작했다. 일본사에서 막말유신기(幕末維新期·1850∼70년대)라고 부르는 이 시기에 막부다이로(大老·총리)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 저명한 양학자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사쓰마-조슈맹약을 이룬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등 수많은 사람들이 암살되었다. 당시 정쟁의 중심이었던 교토는 테러리스트들의 천국이었다. 메이지 정부 수립 후에도 개화정책을 주장하던 요코이 쇼난(橫井小楠), 징병제를 도입한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가 비명횡사했고, 급기야 1878년 당시 최고 권력자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마차로 출근하던 중 암살되는 일이 벌어졌다.
관저서 살해당한 이누카이 총리
면면히 이어지던 ‘테러의 전통’은 1930년대 들어 ‘꽃을 피웠다’. 경제대공황과 만주사변으로 정치·외교·경제가 동시에 불안에 빠지자, 다이쇼 데모크라시 체제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떨어졌고, 군부와 우익세력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1931년 10월 육군 장교들의 쿠데타모의가 발각되더니(10월 사건), 우익단체 혈맹단은 1932년 2월에 재무상·일본은행 총재를 역임한 이노우에 준노스케(井上準之助)를, 3월에는 미쓰이 재벌 총수 단 다쿠마(團琢磨)를 총으로 쏴 죽였다. 이윽고 5월 일본 해군 장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총리의 관저에 난입했다. 당시 미국의 유명 배우 찰리 채플린이 일본을 방문하고 있었다. 이누카이 총리와 이날 면담하기로 했으나 일정이 변경되는 바람에 총리는 관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77세의 노총리는 난입한 젊은 장교들에게 총은 언제라도 쏠 수 있으니 일단 내 말을 들어보라고 했다. 그러나 군인 중 한 명이 “문답무용(問答無用)! 쏴라!”고 소리치자 총탄이 쏟아졌다. 의식이 남아 있던 총리는 주변에 “젊은이들을 불러오게. 할 말이 있네”, “9발이나 쐈는데 3발밖에 맞지 않았으니 병사들 훈련이 엉망이군”이라고 했다 한다. 이누카이 암살을 계기로 정당 내각시대는 막을 내렸고, 이후 1945년 패전까지 다수당의 총재를 대신해 군인·귀족 등이 총리에 임명되었다.
암살된 아베를 향한 동정과 지지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이달 8일 총격을 받기 직전 대중연설을 하고 있다. 아사히신문 제공
테러에 대한 타협과 미화는 결국 ‘대형 사고’로 이어졌다. 1936년 2월 26일 도쿄에 주둔하던 청년 장교 1000여 명이 총리관저·경시청·주요 신문사 등을 습격했다. 테러를 겸한 쿠데타였다. 총리와 조선총독을 역임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재무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 등이 살해되었다. 쿠데타는 진압되었지만, 기성 정치세력에 염증을 느낀 많은 국민들은 청년 장교들에게 동정과 지지를 보냈고, 결국 일본의 군국주의화는 한층 진행되었다.
아베 전 총리의 암살에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가 큰 충격을 받았다. 범인이 해상자위대원 출신이라 순간 전형적인 우익 테러라고 생각했으나, 정치적인 동기는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사람을 ‘지사’로 미화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아베 전 총리에 대한 동정과 지지가 일본을 뒤덮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배경을 깊숙이 파고들어 가다 보면 일본사회 저변에 광범하게 깔려 있는 정치적 좌절감, 사회적 불만과 만날지도 모른다. 일본 시민들의 경계를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