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만들어진 낙인’이 한 사람의 이름을 지우려 할 때

입력 | 2022-07-23 03:00:00

[책의 향기]◇정상은 없다/로이 리처드 그린커 지음·정해영 옮김/600쪽·3만3000원·메멘토



책 ‘정상은 없다’는 정신 질환을 가진 이들에게 사회와 문화가 어떻게 비정상이란 낙인을 찍어 왔는지를 추적한다. 다만 오늘날 대중매체에서 정신 질환을 조명하는 방식은 장애가 수치심의 원천이 아니라는 의미를 전달한다는 면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사진은 자폐를 가진 변호사를 다룬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한 장면. ENA 제공


유방암을 진단받은 한 여성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 충격과 고통은 잠시 논외로 치고, 언제 어디서 살고 있는지에 따라 그의 처지는 크게 달라진다. 중세시대라면 신의 벌을 받았노라 손가락질할지 모른다. 현대문명에선 암이란 질병의 유전적 요인을 꼽으며 가족의 대물림을 우려할 가능성도 있다. 여성의 신체에 민감한 사회라면 치료나 수술 뒤 해당 여성에 대한 인식이 바뀔 수 있다. 그저 질병일 뿐인데도 어떤 시대나 사회는 이 여성에게 “불명예스러운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것이 바로 ‘낙인’이다.

낙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형태로든 존재해왔다. 시점과 장소에 따라 대상은 바뀌지만 정신 질환을 앓는 이들을 향한 비뚤어진 시각은 가장 일반적인 사회적 낙인 가운데 하나다. 미국 조지워싱턴대 인류학과 교수인 저자는 “의학적 진보와 과학적 진보는 정신 질환의 낙인을 줄이지 못했다”며 인류사에서 이와 관련한 낙인이 형성되는 과정을 짚었다.

먼저 서구 자본주의는 정신 질환에 강력한 낙인을 찍은 매개체가 됐다고 진단한다. 자본주의는 사회의 이상적인 인간형을 “독립적인 개인”으로 정의한다. 타인에게 의지해 스스로 생산할 능력을 지니지 못하면 사회적 가치가 없는 실패한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정신 질환으로 경제 활동이 어렵다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태될 대상으로 여겨진단 뜻이다.

반면 공동체의식이 살아있는 사회는 사뭇 다르다. 2017년 저자가 아프리카 남서부에 있는 부족 ‘준오안시’를 방문했을 때다.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는 이 부족마을엔 전형적인 자폐 증세를 보이는 게쉬라는 아이가 있었다. “당신과 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게쉬를 누가 돌볼지 걱정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아이의 아버지는 이웃들을 쳐다보며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우리가 다 한꺼번에 죽지는 않겠죠.” 이들에게 장애를 가진 이는 함께 살아갈 사회 구성원이지, 낙인을 찍고 배제할 대상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롭기만 한 전쟁이 낙인을 다소 상쇄시킬 때도 있다. 웬만한 이들은 모두 전쟁터로 끌려간 뒤 고용주들은 비어 버린 일자리를 장애인들로 채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전쟁이 끝나면 그들은 또다시 일터에서 밀려났지만. 정신의학적 장애가 질병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일명 ‘탄환 충격’은 총격이나 폭발로 겪는 정신적 상처를 일컫는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가운데 약 15%가 탄환 충격 진단을 받고 제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에 이들은 나약함과 꾀병의 상징으로 지탄받기도 했다.

한 사회의 문화가 정신 질환에 대한 낙인을 고착시키는 경우도 있다. 네팔은 여러 전쟁을 겪으며 정신 질환을 앓는 피해자가 적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종교적인 특성상 이들은 정신 질환을 ‘전생의 업보’로 여기며 내버려두는 경향이 강하다. 저자는 네팔의 토속신앙을 활용해 정신병이란 언급을 피하고 마음에 대해 얘기하는 치료법을 권한다.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낙인을 벗어나기란 요원하기 때문이다.

자폐증 등을 주로 연구해온 저자는 가족사 자체가 정신 질환 연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는 19세기 후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활동했으며, 할아버지는 미국 시카고대에서 정신건강의학과를 설립한 장본인이다. 아버지 역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다. 4대에 걸쳐 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온 집안의 내공이 책 곳곳에서 진득하게 묻어난다. 뻔한 도덕적 잣대가 아니라 문화인류학적 고찰을 통해 낙인이란 한계를 극복하려는 저자의 진정성에 경의를 표한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