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디지털 난민 구하는 족집게 강사… “어르신께 스마트세상 선물”[서영아의 100세 카페]

입력 | 2022-07-23 03:00:00

[이런 인생 2막]경로당 누비는 前 IT전문가 임만식 씨
지난달부터 디지털 서포터스 활약… 하루 두 곳씩 스마트폰 활용 교육
어려움 겪는 노인들에 눈높이 강의… “어르신들, 앱 배치만 바뀌어도 패닉
노인 친화 인터페이스 개발 아쉬워”… “보수 적지만 어르신 돕는 데 보람



경기 용인시의 한 경로당에서 어르신들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알려주는 임 씨. 매일 두 군데의 경로당에서 총 3시간 이런 강의를 하고 다닌다. 가는 곳마다 스마트폰 활용에 대한 어르신들의 욕구가 강해 깜짝깜짝 놀란다고 한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자아, 오늘은 네이버닷에 대해 배웁니다. 음성검색 기능을 활용해 내 주변 맛집, 명소 등을 찾아볼 거예요. 화면 아랫단의 녹색 동그라미를 눌러보세요.”

5일 오후 2시 경기 용인시 한 아파트단지의 ‘시니어클럽’(경로당). 임만식 씨(64)가 스마트폰 활용법을 강의한다. 어르신 20여 명이 각자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분주하다.

“아니, 어딜 누르라는겨?”

조금만 방심하면 ‘지방방송’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니 강사는 진땀을 뺀다. 임영아 강사(47)가 어르신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뒤처지는 분이 없도록 돕는다. 임 씨는 “오늘 7가지 배웠으니 다음 주 이 시간까지 하루 한 가지씩만 복습하시면 잊지 않고 쓸 수 있다”고 당부한다. 학생 중 젊은 축인 권인순 씨(69)가 “지난주 서울에 놀러갔을 때 길찾기를 써봤어요. 미리 버스 시간도 알 수 있고 지도도 알아보기 쉬워 편하던데요”라고 했다.

어르신들은 너도나도 “집에 가면 잊어버리지만 다시 배우면 기억이 살아난다”며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한다. 한 어르신은 “손주들에게 사진 보내고 문자 보내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자랑한다.
○“디지털 전문가가 경로당으로 찾아갑니다”

임만식 씨는 32년간의 직장생활을 끝낸 뒤 한 요양원에서 사회복지사로 2년 반 정도 일하기도 했다. 당시 요양원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노인학대’에 대해 강의하는 모습. 임만식 씨 제공

임 씨는 6월부터 매일 경기도 의왕과 용인 일대 경로당을 누비고 있다. 이른바 ‘찾아가는 경로당 디지털 서포터스’다. 하루 두 곳씩, 합쳐서 3시간을 가르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경로당을 찾아가야 하니 이동 시간도 만만찮다.

대한노인회 경기도연합회는 5월부터 스마트폰 활용지도강사 37명을 선발해 요청이 있는 경로당에 보내는 시범사업을 벌이고 있다. 경기도가 4억 원의 예산을 내주었고, 강사들은 활동비로 월 90만∼100만 원을 받는다.

“젊어서부터 봉사하는 인생 2막을 꿈꿔왔는데, 이 일을 통해 꿈을 이뤘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 중에서도 머릿수가 가장 많다는 58년 개띠다. 인생 1막 32년간은 정보기술(IT) 전문가였다. 대기업 IT부서에서 13년, 그 뒤 중소 IT업체를 설립해 19년 일했고 5년 전 만 59세에 은퇴했다.

“은퇴 뒤 ‘혹시 몰라’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어요. 이듬해 한 요양원에 취직해 2년 반 정도 사회복지사로 일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어르신들을 접한 계기가 됐지요.”

꽤 적성에 맞았던 이 일을, 그는 지병인 허리병이 심하게 도지면서 그만두게 됐다.
○왜 경로당인가
2020년 기준 전국의 경로당은 6만7000여 곳. 외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노인여가복지시설이다. 한때 노인끼리 고스톱이나 장기, 바둑이나 두는 어두운 이미지였던 경로당은 요즘 건강관리와 운동, 교육과 친목이 활발하게 벌어지는 공간으로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요양원에서 익히 본 어르신들의 상태를 상상했던 그에게도 이런 경로당은 신세계였다.

“배우고자 하는 의욕도, 인지 기능도 확연히 다르세요. 사소한 기능을 가르쳐드려도 무척 고마워하시죠. 자꾸 잊어버리니 수업은 기초와 반복학습 위주로 합니다.”

이날 수업 장소였던 롯데캐슬레이시티 경로당 감승대 회장(79)은 “노인복지관이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 70대 중반이 넘은 분들은 못 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찾아와서 가르쳐주니 고맙기 그지없다”고 말한다.

오가며 사이다 한 잔, 사탕 한 알 하는 식의 ‘촌지’도 받는다. 수업이 끝나면 수박 한 쪽이라도, 두유 한 팩이라도 먹고 가라고 내미신다. 한때는 열심히 사양했지만 냉큼 받아먹어야 다음 수업으로 빨리 이동할 수 있다는 요령도 터득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자세를 낮추고 눈높이를 맞추면 어르신들은 쉽게 마음을 엽니다. 뭔가 가르쳐 드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론 제가 배우는 게 더 많습니다.”

어르신들과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진행하는 수업은 걸핏하면 샛길로 빠지지만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가득하다. 그는 개점휴업 상태였던 블로그에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다.
○ 노인 ‘디지털 리터러시’를 막는 것들
나이 들어 서러운 일 중 하나가 디지털 소외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바뀌는데, 평생 아날로그 시대를 살아온 노인은 인생 막판에 디지털 나라로 강제 이민당한 난민들과 같다. 문제는 디지털을 모르면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생존이 어려워진다는 점. 디지털 없이는 버스 타기도, KTX 예매도, 식당 주문도 힘들어졌다. 경로당 학생들이 가장 원하는 것도 홈쇼핑과 배달앱을 활용하는 경지. 하지만 장벽이 만만치 않다.

“인터넷뱅킹이나 쇼핑, 배달 등을 가르쳐 드리고 싶어도 개인정보보호 때문에 강사 입장에서 어려움이 큽니다. 은행계좌나 신용카드를 연결해야 하고 보안인증도 수차례 거쳐야 하니까요. 자식이 매번 결제해주는 게 안쓰럽다며 배우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던 어르신은 결국 포기하며 좌절하셨어요. 배우고 싶은데 수전증이 심해서 포기하는 분도 계시고요.”

때로는 노인들의 디지털 자립에 보호자들이 걸림돌이 된다고도 느낀다. 뭘 물어보면 ‘알려’주기보다 ‘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아예 데이터를 차단해놓는 경우도 있다. 그는 한국의 노인 디지털 복지 정책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는다.

“노년층이 디지털에 친숙해지려면 가장 필요한 게 교육일까요. 가령 노인에게 친절한 인터페이스를 따로 개발하면 어르신들이 젊은이와 똑같은 사용법을 익히려 애쓰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죠.”

2년 전부터 ‘시니어 맞춤형 스마트폰’이 대거 보급되면서 어르신들의 스마트폰은 특정 업체, 특정 기종에 쏠려 있다. 월 데이터 2기가 한도에 2만 원 아래 요금제가 적용된다.

“어르신들은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큰 낭패를 느낍니다. 가령 바탕화면이 바뀌거나 앱 배치가 달라지면 패닉에 빠지죠. 지금의 시니어 스마트폰은 이런 어르신들의 습벽이나 생활 속 필요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요. 그냥 보급형 기계를 싸게 많이 팔려는 것 아닌가….”

사실 일본에서 누적 700만 대가 팔렸다는 라쿠라쿠 스마트폰의 경우 교통안내, 지도, 라인(카톡), 문의전화 등 노인들이 많이 쓰는 기능들이 초기 화면에 큼지막하게 고정 배치돼 있고 지문 인증을 채용했다. 대단한 기술보다는 노인에게 친절한 직관적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돋보인다.

“장애인 수의 네 배가 넘는 노년층의 디지털 친화성을 어떻게 담보해줘야 하는지가 요즘 제 화두입니다. 장애인을 위한 인프라가 구축되고 법제화되듯이 노인을 위한 인프라와 법 제도에도 투자가 이뤄져야 합니다. 노년층을 거대한 소비층으로 인식해야죠.”
○베이비붐 세대, 체면 내려놓고 일거리 찾았으면
그의 주변 58년 개띠들, 베이비붐 세대의 근황을 들어봤다.

“자영업이나 의사, 교수같이 정년이 늦은 직업 아니면 대부분 쉬고 있지요. 다들 ‘아직 일할 수 있는 나이’라는 생각에 ‘쉰다’는 말을 잘 못해요. ‘사무실 하나 내서 다닌다’거나 ‘주 1∼2회 아는 회사에 가서 일을 돕는다’고 표현하지요. 비록 하루 3시간이지만 일하는 기쁨으로 충만한 저를 보며 부러워하는 눈치예요.”

그에 따르면 베이비붐 세대는 국민연금 등 생계는 어느 정도 준비돼 있고, 돈보다는 삶의 보람을 위해 일할 곳을 찾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한다. 다만 체면이나 무기력을 내려놓고 주변에서 일거리를 찾는 적극성이 아쉽다고 했다. 예컨대 그 자신은 디지털서포터 일을 군포시가 낸 모집공고에서 발견해 지원했다.

이번 시범사업은 11월 말로 끝난다. 내년에도 계속될지는 정해진 바 없다.

“서포터스 사업이 내년에도 있다면 다시 도전할 거고, 없어진다면 제가 사는 군포시에 시니어를 위한 문화강좌를 열어 달라고 건의할 생각입니다. 이도저도 안 되면 개인적으로 자원봉사를 다닐 겁니다. 어르신들께 도움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삶이 충만해지니까요.”




서영아 기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