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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와 텍스트의 경쟁 [고양이 눈썹]

입력 | 2022-07-23 15:57:00


2022년 3월


“이 책은 태초 이래로 인간문화에는 두 가지 대립되는 전환점이 존재한다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그 첫 번째 전환점은 기원전 2000년대 중반 무렵 완성된 ‘선형문자(알파벳)’의 발명이고, 두 번째는 현재 우리 자신이 그 증인인 ‘기술적 영상’의 발명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 빌렘 플루셔,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1983)

▽인간은 왜 소통할까요. 복제(copy)를 위해서입니다. 내 경험, 내 생각을 타인에게 복제하고픈 욕망이죠. 반대로 누군가의 경험과 지혜를 배우고 싶은 결핍도 복제의 이유가 되죠. 동물에게도 복제 능력은 있습니다. 새끼 때 어미의 행동을 보고 따라하며 먹이를 찾는 요령을 터득하죠.

복제에 대한 욕망은 인간에게 언어(text)가 정착되며 생겼을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든 묘사하고 전파하려 했겠지요. 내가 아까 해뜰 무렵 저 너머 들판에서 큰 소를 만났어. 하마터면 뿔에 받혀 죽을 뻔했지. 나무 뒤에 숨어 죽은 듯 가만히 있어서 겨우 피했어.

무리가 모여 있다면 말로 복제해 전파하지만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면? 그림을 그렸죠. 즉 최초의 기록도구는 그림이었습니다. 암각화 동굴 벽화 등으로 남아있죠. 예술적 의미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충동에서 비롯됐을 거라 봅니다. 상형문자는 그림이 문자로 진화한 것이고요.

▽불경은 사실 석가모니의 말씀 그대로가 아닙니다. 제자 아난의 말을 기록한 것입니다. 아난은 부처의 발언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다 외우기로 유명했다 합니다. 녹음장치나 속기가 없던 시절 이런 기억력의 소유자들이 인기가 있었겠죠. 문맹인들이 많았던 시절에 이야기꾼들이 인기가 있었듯. 텍스트 기억은 인간 고유의 능력입니다.

대신 동물은 영상 기억(photo-memory)이 좋습니다. 영장류의 포토메모리가 인간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입증이 됐습니다(관련기사 “日침팬지, 숫자 기억서 인간에 완승”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71203/87565071/1 참고). 텍스트 기억 능력이 없으니 대신 영상 기억 능력이 발전했을 것이라 짐작해봅니다.

2021년 12월


▽사진 철학자 빌렘 플루셔에 따르면, 소통의 도구로서 그림과 텍스트(이야기)는 그 후 치열한 경쟁을 벌여왔습니다. 처음엔 그림이 앞서 나갔을 것입니다. 이야기와 달리 그림은 기록으로 남아 두고두고 계승됐을 테니까요. 이미지가 텍스트에 우위였죠. 하지만 문자 발명 이후 상황이 역전됩니다.

게다가 문자를 읽고 쓰는 능력은 주로 지배계급에게만 있었습니다. 서양의 라틴문자와 아시아의 한자는 지배층 엘리트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성경은 ‘신의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우상(이미지)를 배척하고 말씀(텍스트)만을 따르는 종교이지요. 유교경전을 비롯한 동양문서는 오직 한자로만 기록되고 전승됩니다.

▽그렇다고 소통 도구로서 이미지가 완전히 ‘말살’되지는 않았습니다. 중세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그림은 성경을 읽을 수 없는 문맹자들을 위한 교화 도구였습니다. 성경 에피소드에 대한 압축적 이미지지요. 동양에서도 실용서엔 설명적인 삽화가 있었습니다.

활자 기술이 퍼지며 대량 복제가 가능해지면서 근대 이후 텍스트의 시대는 꽃을 피웁니다. 한반도에선 한글이 퍼지고 일본에선 히라가나가 퍼졌죠. 텍스트가 이미지를 압도한 것이죠.

텍스트의 가장 큰 매력은 상상력입니다. ‘상상(想像·imagine)’은 이미지(像)을 머릿속에서 그려낸다는 뜻이죠. 동화책을 읽으면 이야기 장면을 어린이들은 저마다의 이미지로 마음속에서 그려냅니다. 소설이 영화화되면 관객들이 항의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영화 속 이미지가 자신의 상상과 맞지 않아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상상은 구체적인 시각적 경험과 기억으로 변신합니다.

2021년 1월 / 이미지로 정보를 제공하는 기록사진엔 문자(텍스트)가 많이 찍힙니다. 가장 쉽게 내용을 전달하는 방법이기 때문이죠. 쉬운 방법이지만 좋은 사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텍스트의 이미지 우위 권력이 깨지게 된 것은 기술적 이미지(카메라)의 탄생이라고 사진플루셔는 설명합니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기술적 영상 시대는 급가속 페달을 밟습니다. 문자는 배우면 누구나 쓰고 읽지만 고급 그림은 전문가만이 그려왔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폰카를 들고 있습니다. 모든 기록을 폰카로 해도 무방합니다. 누구나 그림으로 기록하고 표현할 수 있는 기술적 이미지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신뢰성도 있고, CCTV와 블랙박스는 기록 능력이 뛰어납니다.

“뉴스성이 높아도 그림이 없으면 뒤에 배치한다” 방송뉴스의 기본 편집 방침입니다. 뉴스에 CCTV 영상으로 편집한 자잘한 뉴스들이 많은 이유입니다. 이미지는 소통방식이 즉자적이라 반응이 금방 옵니다.

물론 텍스트는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발전하고 있죠. 스마트폰 등장 이후 이용자들은 ‘톡’으로, 문자로 더 많이 소통합니다. 가히 웹 필담(筆談)이라 할만합니다. 모든 영상에 나레이션과 자막은 기본입니다. 영상과 텍스트가 얽히고설키는 융합의 콘텐츠가 기본입니다. 초기 무성영화 시절엔 대사가 없었지만 동시녹음을 하는 지금은 배우의 발성법이 매우 중요합니다. 스토리 전달은 대사 위주로 하니까요.

이미지와 텍스트가 어떻게 서로 경쟁하고 상호 견제하면서 소통의 도구로서 더 발전할지 아직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둘 중 어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겁니다.



신원건기자 laput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