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인생 2막]‘디지털 강사’로 경로당 누비는 전직 IT전문가 임만식 씨 32년 IT전문가, 사회복지사·디지털 강사로 인생 2막 디지털에서 소외된 노년층 역량 길러주기에 발 벗고 나서 경로당 어르신들, 스마트폰 활용교육에 환영 일색 쇼핑, 배달 앱 사용 원하지만 현실장벽에 좌절하는 어르신 많아 노인 친화적 인터페이스 개발 등 디지털 문맹 타파에 투자 필요 베이비붐 세대, 체면 내려놓고 보람 얻을 일거리 찾았으면
임만식 씨가 경기도 용인시 롯데캐슬레이시티 경로당에서 어르신 학생들을 대상으로 스마트폰 활용법을 강의하고 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수업에 열중하는 어르신들. 이 아파트 경로당은 용인에서도 가장 시설이 좋기로 정평이 났다고 한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자아, 오늘은 네이버닷에 대해 배웁니다. 음성검색 기능을 활용해 내 주변 맛집, 명소 등을 찾아볼 거예요. 화면 아랫단의 녹색 동그라미를 눌러보세요.”
5일 오후 2시 경기도 용인시 한 아파트단지의 ‘시니어클럽’(경로당). 임만식 씨(64)가 스마트폰 활용법을 강의한다. 삼삼오오 모여 앉은 어르신 20여 명이 각자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분주하다.
“아니, 어딜 누르라는겨?”, “요기, 요거 눌러요”.
“3주 전 수업 때 ‘네이버 길 찾기’ 알려드렸는데 지금 하라면 못하시겠죠? 오늘 가르쳐드린 것도 내일 하라고 하면 못하실 거예요. 그쵸?”
수업이 끝나갈 무렵 임 씨의 말에 일동은 까르르 웃는다.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임 씨는 “오늘 7가지 배웠으니 다음주 이 시간까지 하루 한가지씩만 복습하시면 잊지 않고 쓸 수 있다”고 당부한다. 학생 중 젊은 축인 권인순 씨(69)가 “지난주 서울에 놀러갔을 때 길찾기 써봤어요. 미리 버스시간도 알 수 있고 지도도 알아보기 쉬워 편하던데요”라고 응수했다.
어르신들은 너도나도 “집에 가면 잊어버리지만 다시 배우면 기억이 살아난다”며 “새로운 것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한다. 한 어르신은 “손주들에게 사진 보내고 문자 보내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자랑한다.
●“디지털 전문가가 경로당으로 찾아갑니다”
임 씨는 6월부터 매일 경기도 의왕과 용인 일대 경로당을 누비고 있다. 이른바 ‘찾아가는 경로당 디지털 서포터즈’다. 하루에 두 곳씩, 합쳐서 3시간을 가르친다. 지난 한달 여간 10군데 경로당에서 강의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경로당에 찾아가야 하니 이동시간도 만만찮다.대한노인회 경기도연합회는 5월부터 스마트폰 활용지도강사 37명을 선발해 요청이 있는 경로당에 보내는 시범사업을 벌이고 있다. 경기도가 4억 원의 예산을 내주었고, 서포터들은 활동비로 월 90~100만 원 정도를 받는다.
그는 대한민국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 중에서도 머릿수가 가장 많다는 ‘58년 개띠’다. 인생1막 32년간은 IT전문가였다. 대기업 IT부서에서 13년, 그 뒤 중소 IT업체를 설립해 19년 일했고 5년 전, 만 59세에 은퇴했다.
“은퇴 뒤 ‘혹시 몰라’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어요. 이듬해 한 요양원에 취직해 2년 반 정도 사회복지사로 일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어르신들을 접한 계기가 됐지요.”
꽤 적성에 맞았던 이 일을, 그는 지병인 허릿병이 심하게 도지면서 그만두게 됐다.
임씨는 32년간의 IT업계 근무를 마친 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고 요양원에서 2년 반 정도 일했다. 왼쪽은 요양원 송년행사에서 산타클로즈로 분한 모습. 오른쪽은 양로원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노인학대 방지’ 교육을 진행하는 모습. 임 씨는 요양원에서 “노년의 가장 큰 적은 외로움임을 절감했다”고 한다. 사진제공 임만식 씨
●왜 경로당인가
2020년 기준 전국의 경로당은 6만 7000여 개소. 외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공인 노인여가복지시설이다. 한때는 초고령 노인끼리 모여 고스톱이나 장기, 바둑이나 두는 어두운 이미지였던 경로당은 요즘 건강관리와 운동, 교육과 친목이 활발하게 벌어지는 공간으로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요양원에서 익히 본 어르신들의 상태를 상상했던 그에게도 이런 경로당은 신세계였다.사실 스마트폰 활용교육은 노인복지관이나 문화센터에서도 한다. 하지만 굳이 경로당에 찾아가서 하는 이유는 고령자들을 배려해서다. 이날 수업장소였던 롯데캐슬레이시티 경로당 감승대 회장(79)은 “인근 노인복지관이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 걸어가기도 차를 타기도 어정쩡하다. 아무래도 70대 중반 넘은 분들은 잘 가지 않게 되는데, 이렇게 찾아와서 가르쳐주니 고맙기 그지없다”고 말한다.
오며가며 사이다 한 잔, 사탕 한 알 하는 식의 ‘촌지’도 받는다. 수업이 끝나면 수박 한쪽이라도, 두유 한 팩이라도 먹고 가라고 붙잡는 일도 다반사. 한때는 열심히 사양했지만, 냉큼 받아먹어야 다음 수업으로 빨리 이동할 수 있다는 요령도 터득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자세를 낮추고 눈높이를 맞추면 어르신들은 쉽게 마음을 엽니다. 뭔가 가르쳐드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제가 배우는 게 더 많습니다.”
어르신들과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진행하는 수업은 걸핏하면 샛길로 빠지지만,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가득하다. 임 씨는 이 일을 시작한 뒤부터 개점휴업상태였던 블로그에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다. 이런 식이다.
“한 어르신이 연락처 목록을 내밀며 ‘싸랑하는 영감’을 맨 위로 올려달라고 청하셨다. ‘자동으로 가나다순으로 정렬되니 어렵다’고 답했다가 수업이 끝난 뒤 ‘가장 싸랑하는 영감’으로 이름을 바꿔드리니 목록 맨 위에 뜬다. 혼자 뿌듯해했는데 알고 보니 목록 순서를 지정하는 기능이 따로 있다고 한다….”
블로그에는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스마트폰 사용 팁도 연재된다.
●노인 ‘디지털 리터러시’를 막는 것들
임만식 강사가 휴대폰 초기화면 설정을 시연하고 있다. 임강사는 노인을 거대한 소비층으로 인식하고, 디지털 교육에 대한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인터넷뱅킹이나 쇼핑, 배달 등을 가르쳐드리고 싶어도 개인정보보호 때문에 강사 입장에서 어려움이 큽니다. 은행계좌나 신용카드를 연결해야 하고 보안인증도 수차례 거쳐야 하니까요. 자식이 매번 결제해주는 게 안쓰러워 배우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셨지만 결국 포기하고 좌절하는 어르신을 바라보며 씁쓸했습니다. 배우려는 의지는 강하나 수전증이 심해서 포기하는 어르신도 계세요. 여하튼 안타까운 사연이 넘쳐납니다.”
때로는 노인들의 디지털 자립에 보호자들이 걸림돌이 된다고도 느낀다. 뭘 물어보면 ‘알려’주기보다 ‘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아예 데이터를 차단해놓는 경우도 있다.
“어느 어르신은 밖에 나가면 조용하던 휴대전화가 집에만 돌아가면 ‘카톡카톡’ 시끄럽다고 하셔서 살펴보니 데이터 차단을 해놓으셨더군요. 어르신은 그게 뭔지를 모르니 내 전화가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거구요. 사실 가르쳐드려도 해결 능력까지 갖추기는 쉽지 않죠. 그래도 ‘이건 아닌데’ 싶을 때가 간혹 있어요.”
●시니어를 배려한 인터페이스 개발, 그거 어렵나요?
그는 나아가 노인 디지털 복지 정책에 대해서도 가끔 의문을 품는다. “노년층이 디지털에 친숙해지려면 교육보다 친화성이나 접근성 확보가 먼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어르신들의 휴대전화를 들고 함께 씨름을 해볼수록 노인에 대한 배려가 별로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려요. 노인에게 친절한 인터페이스를 따로 개발하면 어르신들이 젊은이들과 똑같은 사용법을 익히려 애쓰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죠.”
2년 전부터 ‘시니어 맞춤형 스마트폰’이 대거 보급되면서 어르신들이 가진 스마트폰은 특정 업체 특정 기종에 쏠려 있다. 대개 월 데이터 2기가 한도에 2만 원 아래 요금제가 적용된다.
“어르신들은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큰 낭패를 느낍니다. 가령 바탕화면이 바뀌거나 앱 배치가 달라지면 패닉에 빠지시죠. ‘여기 있던 단추(앱) 어디 갔느냐. 원래대로 해 달라’고. 지금의 시니어 스마트폰은 이런 어르신들의 습벽이나 생활 속 필요성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요. 그냥 보급형 기계를 싸게 많이 파는 데 치중하는 것 아닌가….”
사실 일본에서 누적 700만대가 팔렸다는 라쿠라쿠스마트폰의 경우 교통안내, 지도, 라인(카톡), 문의전화 등 노인들이 많이 쓰는 기능들이 초기화면에 큼지막하게 고정배치 돼 있고 지문인증을 채용했다. 대단한 기술보다는 노인의 특성을 반영한 직관적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돋보인다.
“장애인 수의 네 배가 넘는 노년층의 디지털 친화성을 어떻게 담보해줘야 하는지가 요즘 제 화두입니다. 장애인을 위한 인프라가 구축되고 법제화되듯이 노인을 위한 인프라와 법 제도에도 투자가 이뤄져야 합니다. 노년층을 거대한 소비층으로 인식해야죠.”
일본의 시니어용 스마트폰 라쿠라쿠 스마호. 노인들이 긴요하게 쓸 기능들을 직관적으로 배치한 사용자 중심 인터페이스가 돋보인다.
●베이비붐 세대, 체면과 무기력 내려놓고 일거리 찾았으면
그의 주변 58년 개띠들, 베이비붐 세대의 근황을 들어봤다. “자영업이나 의사 교수같이 정년이 늦은 직업 아니면 대부분 쉬고 있지요. 다들 ‘아직 일할 수 있는 나이’라는 생각에 ‘쉰다’는 말을 잘 못해요. ‘사무실 하나 내서 다닌다’거나 ‘주 1~2회 아는 회사에 가서 일을 돕는다’고 표현하지요. 비록 하루 3시간이지만 일하는 기쁨으로 충만한 저를 보며 ‘좋은 일 하네’, ‘넌 일거리가 있구나’라며 부러워하는 눈치예요.”
그에 따르면 베이비붐 세대는 국민연금 등 생계는 어느 정도 준비돼 있고 돈보다는 삶의 보람을 위해 일할 곳을 찾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한다. 다만 체면이나 무기력을 내려놓고 주변에서 일거리를 찾는 적극성이 아쉽다고 했다. 예컨대 그 자신은 디지털서포터 일을 군포시에서 낸 모집공고에서 발견해 지원했다.
이번 시범사업은 11월 말로 끝난다. 내년에도 이어질지 여부는 정해진 바가 없다.
“서포터스 사업이 내년에도 있다면 다시 도전할 생각이고, 없어진다면 제가 사는 군포시에 시니어를 위한 문화강좌를 열어달라고 건의하려 합니다. 이도저도 안되면 개인적으로 자원봉사 다닐 겁니다. 어르신들께 도움이 된다는 것만으로 삶이 충만해지니까요.”
2009년 경 중소 IT기업에서 일하던 당시 모습. 임씨는 대기업 IT부서를 거쳐 중소기업을 퇴직하기까지 32년간 IT업계에 종사했다. 임만식 씨 제공
서영아 기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