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수평선을 보다
한반도 삼면이 바다라고는 하지만, 바다를 보려면 큰마음 먹고 먼 길을 떠나야 한다. 상당한 시간과 돈을 들여 호젓한 바닷가에 도착해야 한다. 힘들여 도착하여 마침내 텅 빈 바다, 텅 빈 하늘, 그리고 하늘과 바다가 만나 만드는 간명한 수평선을 본다. 이 단순한 풍경을 오래도록 보는 것도 아니다. 잠시나마 그 무심한 풍경을 눈에 담기 위해서 기꺼이 먼 거리를 달려서 온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게 다 있는 것 같기도 한 풍경. 그 풍경을 보면서, 나는 잠시 종교적인 사람이 된다.
스위스계 프랑스 화가 펠릭스 발로통의 1910년 작품 ‘바람’(위 사진)과 일본 교토 료안지의 가레산스이(마른 정원) 모습. 워싱턴 국립미술관 홈페이지·위키피디아
미국 화가 에드먼드 타벨이 1898년에 그린 ‘파란 베일(The Blue Veil)’이라는 작품도 마찬가지다. 제목이 시사하듯, 그림의 주인공은 옆모습을 한 여성이라기보다는 그 여성이 두르고 있는 파란 베일이다. 베일의 일렁임은 바로 그 순간 바람이 불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작고한 문학 평론가 김현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빗질 자국이 남아 있는 마당이 빗질 자국조차 없는 마당보다 깨끗해 보인다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보다 빗질 자국을 남기는 것이 더 깨끗해 보인다니, 그게 정말일까. 일본 교토에 있는 료안지(龍安寺)의 가레산스이(枯山水·마른 정원)를 본 사람은 김현의 말에 공감할 것이다. 선(禪)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다는 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메마른 인공 정원. 그 모래와 돌 위에는 정원을 가다듬을 때 지나갔던 써레질 자국이 남아 있다. 아무 자국이 없는 것보다는 그 쓸린 자국이 료안지의 마른 정원을 선적(禪的)으로 만든다. 불필요한 잡것을 비워내고자 했던 노력의 흔적이 료안지를 한층 더 선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닐까. 인간을 혐오한 나머지, 인간이 단 한 명도 없는 정글을 마냥 그린다고 해서 인간의 부재가 잘 묘사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만든 문명의 흔적을 그리되 인간은 그리지 않을 때, 인간의 부재가 한층 더 도드라진다. 거대한 건물의 잔해 그림이 전하는 기묘한 감동은 바로 그러한 인간의 효과적 부재에서 오는 것이다.
소리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닐까. 정말 아무 소리도 없는 정적 상태는 고요하기보다는 고요함이 시끄럽게 설치고 있는 상태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백색 소음이 있는 것이 어떨까. 아무 소리도 없는 것보다는 백색 소음이 있어야 마음이 더 안정된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백색 소음이 있어야 집중이 더 잘되고, 잠도 더 잘 온다는 사람들도 있다.
토론의 경우도 그렇지 않을까. 정말 아무 이야기도 오가지 않는 상황은 실로 견디기 어렵다. 그 침묵이 견디기 어려워 마침내 말을 꺼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난다. 적당한 백색 소음 혹은 개소리들이 오가고 있으면, 오히려 사람들이 안심하게 된다. 지성의 부재도 마찬가지 아닐까.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보다, 틀린 이야기를 열심히 하는 상태가 지성의 부재를 웅변한다.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는 일본 출신 사진작가 스기모토 히로시의 ‘바다풍경(海景)’ 연작 중 자메이카에서 바라본 카리브해(1980년). 그는 수십 년간 세계를 돌며 바다와 하늘이 마주치는 장면을 집요하게 찍어 왔다. 사진 출처 스기모토 히로시 홈페이지
그러한 수평선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굳이 강변할 필요가 있을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기에 원한다면 당신이 무엇인가 담을 수도 있다. 인생에 정해진 의미가 없기에, 각자 원하는 의미를 인생에 담을 수 있듯이. 그래서였을까.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나 안겔루스 질레지우스 같은 신비주의자들은 하느님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부재 혹은 없음 속에서 인식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지전능의 하느님을 ‘없음’이라고 불렀다. 무엇인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곧 어떤 한계와 장애를 의미하므로.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