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의 주인공 안티고네(왼쪽)는 반역자의 시신 매장을 금지한 왕의 명령을 어기고 가족의 의무를 따라 오빠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한 뒤 죽임을 당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누구도 법의 구속을 벗어나기 어렵다. 소크라테스는 국법이 암묵적 약속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불리한 경우라도 수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법의 판결에 따라 기꺼이 독배를 마신 철학자도 법이 모든 것 위에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한 나라의 법이 어떻게 인간의 권리와 의무를 모두 담아낼 수 있을까? 하물며 그렇게 불완전한 법이 눈먼 권력자의 손에 들어간다면 그 결정을 따르는 것이 옳은가? 그래서 국법과 국법 너머의 갈등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그런 갈등의 파국을 보여주는 비극이다.》
국가의 법과 가족 의무의 충돌
안티고네는 불행한 여인이다. 그녀는 존엄한 왕에서 역병을 불러온 패륜범으로 전락한 오이디푸스의 딸이었다. 불행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자리를 놓고 두 오빠가 다퉜고, 이 싸움은 칼부림으로 끝났다. 이웃나라를 끌어들여 권력을 탈취하려던 폴뤼네이케스와 그에 맞섰던 에테오클레스가 서로 찔러 죽였다. 이 사건은 또 다른 불행을 낳았다. 조카들의 죽음을 계기로 왕위에 오른 크레온이 폴뤼네이케스를 반역자로 낙인찍고 시신 매장을 금지했다. ‘명령을 어기는 자는 시민들이 돌로 쳐서 죽일 것이다!’ 왕의 명령은 곧 국법이었다. 안티고네는 어찌 해야 할까? 국법의 이름으로 선포된 크레온의 명령을 따라야 할까, 아니면 가족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오빠의 시신을 묻어야 할까?
안티고네는 자신의 몰락을 예감하면서도 진실을 파헤치는 고집스러운 아버지 오이디푸스를 닮았다. 안티고네는 오빠의 시신을 매장하기로 결심한다. “잘 생각해 보세요. 유일하게 살아남은 우리 두 자매도 법을 무시하고 왕의 명령이나 권력에 맞서다가는 누구보다 가장 비참하게 죽고 말 거예요.”(천병희 옮김 ‘안티고네’ 중) ‘현실’을 아는 동생 이스메네의 만류도 그녀의 뜻을 꺾지 못한다. 무지에서 오는 무모함이 아니다. 안티고네는 자신의 결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것이 낳을 결과가 어떤 것인지 잘 안다. 오빠의 시신 매장은 목숨을 건 ‘범행’이다. 하지만 그녀는 주저하지 않는다. 안티고네에게는 그 일이 ‘경건한 범행’이었기 때문이다. “내 가족과 나 사이를 가로막을 권한이 그에게는 전혀 없어.” 외삼촌이자 군왕인 크레온을 향해 그녀가 외친다.
“이 짓을 금하노라 포고한 걸 알고 있었느냐?”
“그래요. 어떻게 모를 리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감히 이 법령을 위반했다는 말이냐?”
“제가 보기에 이것을 명하신 이는 제우스가 아니며, 하계의 신들과 함께 사시는 정의의 여신께서도 인간들에게 그와 같은 법은 정하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당신의 포고가 그만큼 강력하다고 생각지도 않아요. 기록되진 않았지만 확고한 신들의 법을 필멸의 존재가 넘어설 수는 없지요.”
안티고네의 죽음이 부른 비극
안티고네는 많은 사람들에게 법을 앞세운 폭정에 맞선 저항의 상징이 됐다. 넬슨 만델라는 “우리의 투쟁을 상징하는 인물은 안티고네였다”고 말했다.(임철규의 ‘그리스 비극’에서 재인용)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조국을 배반한 오빠의 시신을 매장하는 일이 자신의 젊은 목숨을 내걸 만큼 중대한 일이었을까?’ 하지만 안티고네라면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가족이 무덤도 없이 새들과 개들의 먹이가 되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도록 내버려 두는 게 옳다는 말인가?’ 크레온의 행동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는 국법의 명령자이자 수호자로서 당연한 행동을 하지 않았나? 국가가 있어야 가족도 지킬 수 있는 게 아닐까?’ 이런 국가지상주의나 실정법 옹호론도 반문을 피할 수 없다. ‘가족의 사랑과 의무조차 품을 수 없는 국법이라면, 그것이 지키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오이디푸스 왕’이 그렇듯, ‘안티고네’ 또한 우리에게 수많은 질문을 남긴다.
실천적 지혜 없는 ‘눈먼 폭력’
사람은 법 없이 살 수 없지만, 모든 법에는 한계와 약점이 있다. 법에는 항상 ‘불법의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아무것도 불법으로 규정하지 않는 법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이 드리우는 ‘불법의 그림자’가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가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스스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도 법의 치명적 약점이다. 법은 보편적이기 때문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두 규정할 수 없다. 그래서 개별 상황에 어떤 법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를 판단하는 일은 법을 적용하는 사람의 몫이다.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법의 지배보다 지혜로운 자의 지배를 더 우월한 가치로 여겼던 것은 그 때문이다. 보편적인 법을 개별적 상황에 적용하는 능력, 즉 ‘실천적 지혜’가 없다면, 법은 앞을 분간하지 못하는 눈먼 폭력일 뿐이다.
‘안티고네’의 마지막은 절망적이다. 현실의 권력과 국법을 향한 의지도, 신의 정의와 인륜을 향한 호소도 파멸의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하지만 파멸에도 높낮이가 있다.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았던 크레온은 권력을 지키려다 모든 것을 잃었다.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던 안티고네는 마지막 목숨을 버림으로써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켰다. 원칙과 고집은 때로는 파멸을, 때로는 승리를 가져온다. 모든 것을 가진 자의 파멸과 모든 것을 잃은 자의 승리, 이것이 드라마 ‘안티고네’의 반전(反轉)이다. 인간의 역사가 그런 반전의 연속이 아닌가.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