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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언어의 한계 너머에서 ‘말할 수 없는 아픔’ 보듬다

입력 | 2022-07-30 03:00:00

◇아주 조용한 치료/사이쇼 하즈키 지음·전화윤 옮김/484쪽·2만2000원·글항아리



저자가 모래놀이치료에 참여하며 꾸몄던 모래상자 속에는 어린 시절 그가 자랐던 고향 고베의 풍경이 담겨 있다. 글항아리 제공


누군가에겐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 일본 심리상담가 기무라 하루코와 5년 넘게 상담한 자폐아 Y 군도 말보다 몸짓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걸 쉬워했다. 기무라는 아이에게 억지로 말을 건네는 대신 작은 모래상자를 건넸다. 상자 안을 건물과 나무, 자동차 등 미니어처로 꾸미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모래놀이 치료법’의 일환이었다.

언제나 모래 위에 똑같이 2개의 산과 바다를 배치하던 Y 군에게 느리지만 변화가 찾아왔다. 산과 산을 잇는 도로를 만들고 철도를 놓기 시작했다. 기무라는 이 사소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작은 마을이 다른 도시로 연결되듯 아이의 마음 역시 열리고 있는 게 아닐까. 기무라의 믿음대로 치료를 마친 Y 군은 고교 학생회장에 뽑혔고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도 진학했다. 상담가가 답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11년 일본의 심리치료 상담가이자 수필가인 나카이 히사오가 그린 그림이다. 산 뒤편 바다 너머 탁 트인 풍경은 그가 의학과 문학이라는 두 세계에 모두 열려 있음을 보여준다. 글항아리 제공 

일본 논픽션 작가인 저자는 이런 과정들이 신기했다. 어떻게 아무런 말도 없이 그림을 그리거나 모래놀이를 하는 것만으로 사람의 마음이 회복될 수 있을까. 저자는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2008년부터 5년 동안 기무라를 포함한 정신건강의학계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고 실제 치료 현장을 꼼꼼히 취재했다. 직접 임상심리사 자격 취득 과정을 밟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놀라운 사실을 접한다. 비언어 치료법은 1929년 영국 소아과 의사인 마거릿 로언펠드가 말이 서툰 어린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 개발한 것. 하지만 이 치료법이 마음에 상처를 지닌 어른들에게도 무척 효과적이란 걸 배웠다.

30대 여성 우울증 환자인 이토 에쓰코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서른두 살에 시각세포가 손상되는 ‘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고 결국 실명한 그는 일자리를 잃고 남편과 이혼한 뒤 홀로 남겨졌다. 극단적 선택까지 생각할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던 이토에게 모래놀이 치료는 놀라운 변화를 안겨줬다.

이토는 텅 빈 모래상자에 조금씩 나무숲과 마을을 채워나갔다. 특히 마지막 치료에서는 높은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성인 여성의 미니어처를 놓았다고 한다. 마치 한발 한발 내딛은 자신을 상징하듯이. 1년가량 이어진 치료 뒤에 이토는 ‘조각가’라는 새로운 인생의 꿈을 가지게 됐다. “상담사가 그에게 생의 의지를 찾아준 것이 아니라 빈 상자를 채워나가며 그녀 스스로 꿈과 의지를 되찾은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저자는 현대인에게 논리적인 언어보다 비언어를 통한 심리 치료가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 다수의 정신건강의학계 전문가는 “상담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어른들이 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를 이른바 ‘주체의 부재’ 현상이라 부른다.

현대사회는 소셜미디어의 영향으로 나와 타인,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이로 인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어떤지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저자가 만난 한 여성은 눈물을 흘리며 “죽고 싶다”고 괴로워하면서도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런 것인지 설명하지 못하는 막막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일까. 뻔해 보여도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한 상담가는 언제나 상담 치료에 앞서 환자에게 “방법은 반드시 찾아질 테니 함께 고민해 보자”는 말을 건넨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자생력을 몸속에 지니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몇 년째 이어지면서 심리적 번아웃(소진)을 토로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에서 회복하기 위해 진정 필요한 게 뭔지는 깨닫기 어렵다. 어쩌면 그런 이들에게는 현재의 상태를 낱낱이 파헤쳐 해답을 얻으려는 분석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함께 내면으로 향하는 길을 찾아가며 어깨를 두드려줄 주변의 도움이 절실한 것 아닐까. 진득하게 현장을 살핀 저자의 노력 덕인지 오래도록 잔향이 남는 책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