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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오방색, 한국 채색화 지평 열다[윤범모의 현미경으로 본 명화]

입력 | 2022-08-02 03:00:00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채색화 특별전 ‘생의 찬미’ 전시. 이종상 작가의 ‘원형상 89117-흙에서’(왼쪽)와 박생광 작가의 ‘전봉준’이 전시돼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보면 볼수록 감칠맛이 난다. 식당에서가 아니고 전시장에서다. 음식물을 당기게 하는 것을 감칠맛이라 한다면, 자꾸 보고 싶게 만드는 그림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음미할수록 그윽한 맛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박생광(1904∼1985)의 대표작 ‘전봉준’(1985년)을 두고 하는 말이다. 길이 5m가 넘는 대작이다. 현재 이 그림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생의 찬미’ 전시장에서 볼 수 있다. 천장까지 꽉 차게 걸려 압도감을 자아낸다.

말년의 박생광은 가난했다. 반반한 화실 하나 제대로 갖고 있지 않았다. 서울 변두리 조그만 한옥의 문간방이 그의 작업실이었다. 그래서 대작은 한꺼번에 펼쳐놓고 작업할 수 없었다. 종이 두루마리 작업. 한쪽은 펼치고, 또 한쪽은 접고, 이런 식으로 말아가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니까 박생광은 작업 도중에 자신의 작품을 한눈에 다 볼 수 없었다. 전시장에 작품이 걸려야 비로소 자신의 대작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이렇듯 옹색한 환경에서 민족 회화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채색화의 복권이라는 거대한 도전이었다.

박생광은 나이 70대에 이르러 글자 그대로 환골탈태했다. 젊은 시절 일본에서 활동했던 습관을 과감하게 버리고 짙은 원색으로 채색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원로 작가는 자신이 이룩한 화풍을 고수하면서 화사한 색채로 노년을 즐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박생광은 노년에 이르러 과감한 실험에 도전했다. 오방색 중심의 채색화를 새롭게 시작했다. 소재는 민속, 불교, 역사 등 다양했다. 모두 우리 민족의 색채 의식을 반영했고, 특히 근대사의 현장을 화면에 담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말년의 걸작 ‘전봉준’, ‘명성왕후’ 등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한국 화가 박생광이 말년인 1985년 그린 채색화 ‘전봉준’. 붉은색을 중심으로 오방색을 화려하게 사용했다. 동학농민운동의 주역 전봉준(가운데)을 비롯한 모든 인물과 배경이 강렬한 색채 안에서 꿈틀댄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전봉준’은 기세가 넘치는 전봉준의 모습을 화면 중앙에 모시고, 그 주위에 일본군과 맞서고 있는 동학군을 묘사했다. 바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현장을 실감나게 재현한 작품이다. ‘호남제일성’이라고 쓴 현판이 뒤에 보여 전주 지역임을 알게 한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붉은색을 배경처럼 깔고 전봉준은 하얀 옷을 입어 강약 대비 효과를 극대화했다. 화면 아래 군함과 기마병, 대포 등이 있어 치열한 전투 현장임을 표현했다. 그런 가운데 닭과 황소가 있고, 그 사이에 누워서 절규하는 아낙네의 상반신이 그려져 있다. 짜임새 있는 구성과 과감한 색채 그리고 기운이 뻗치는 윤곽선 등 명작의 요소를 다 갖추었다.

박생광 회화의 채색 기법은 이렇다. 우선 목탄으로 대상의 윤곽선을 그리고 아교 물을 칠해 바탕에 스며들게 한다. 직선은 한꺼번에 내려 긋지 않고 끊어서 긋는다. 물감은 팔레트 위에서 섞지 않고 화면 위에 직접 원색을 칠한다. 물감을 칠하고 숟가락으로 걷어내고 다시 다른 색을 덧칠하여 중첩시키기도 한다. 오방색 중심의 원색은 강렬한 흡인력을 만든다. 작가 말년에는 분채(粉彩)보다 오히려 단청 안료를 즐겨 사용했다. 채색화의 새로운 경지였다.

사실 한국은 채색화 전통의 나라였다. 하지만 조선왕조의 유교 문화는 수묵 문인화 중심으로 회화사를 엮게 하여 채색화의 약세를 보였다. 채색화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부터 고려 불화 그리고 조선의 궁정 회화, 불화, 무속화, 이른바 민화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펼쳐졌다. 생산된 작품의 숫자로 보나, 수용한 사람들의 숫자로 보나, 수묵화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 게 채색화의 역사였다. 그런데 현재 대학에서 사용하는 한국회화사 교과서 같은 책을 보면 이른바 민화 작품은 완전 무시했다. 현재 미술대학에서 채색화를 가르치는 교수도 거의 없지만 배우는 학생도 별로 없다. 채색화 전통의 위기라 할 수 있다. 이런 미술계 현실을 반성하고자 국립현대미술관은 개관 이래 처음으로 본격적인 채색화 특별전을 마련했다. 채색화의 기능과 현대성을 감안한 전시기획이었다. 이런 시도를 부정적으로 볼 관객도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채색화의 복권이다. 이런 시도의 전시장에서 박생광의 ‘전봉준’은 상징성이 매우 크다.

얼마 전 경남 진주시에서도 채색화 특별전을 개최한 바 있다. 전시를 보러 진주에 갔다가 나는 박생광 무덤을 찾았다. 시내에서 30분가량 달려 미천면 오방리의 옛 미천초등학교 뒷산으로 갔다. 커다란 묘비는 화가의 생애를 요약 정리했다. 다만 안타까운 일은 벌초한 지 오래되어서 그런지 잡초가 무성했다는 점이다. 키 큰 풀들 때문에 봉분을 돌아볼 수 없었다. 박생광 무덤은 오늘날 한국 채색화의 현실을 상징하고 있는 듯하여 참담했다. 나는 작가의 말년에 그와 가깝게 지내는 행운을 가졌다. 박생광 회고전을 기획하는 나에게 주위 어른들은 ‘무당 그림’으로 무슨 전시를 열려고 하냐고 말렸다. 그래도 나는 크게 각광받을 날이 올 것을 확신하고 화가의 생애를 정리했다. 화가는 한국 근대 역사의 주제로 대작에 도전했다. 하지만 후두암으로 제작에 차질을 보였다. 풍선처럼 목에 매달린 혹. 화가는 흉하다면서 외부인과 만나지 않았다. 나는 그럴수록 화가의 인생을 빨리 정리해야 했지만 작가 생전에 회고전 개최는 이룰 수 없었다. 작가 사후에 예술 세계는 재평가되어 명성은 날로 올라갔고, 그림 값도 올라갔다. 원색을 좋아하는 한국인, 채색화의 진정한 복권을 기대하게 하는 오늘의 현실이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