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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아우디 디자이너 박찬휘 “아버지는 말하셨지, 상식을 의심하라고…”

입력 | 2022-08-03 11:23:00


 
돌잡이로 연필을 잡았다. 모두들 판검사가 될 거라 기뻐했지만, 그는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연필로 주구장창 낙서를 했다. 교과서 모퉁이, 버려진 달력의 뒷면이 그의 놀이터였다.

학교에서 선생님은 왼손잡이에다 교과서에 낙서만 하는 그를 혼내기 일쑤였다. 누가 내 낙서를 발견할까 언제나 마음 졸이던 아이. 유일하게 아버지 앞에서만큼은 당당히 낙서를 꺼내 보였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의 1세대 자동차 디자이너인 박종서 전 국민대 산업디자인과 교수(75). 아버지는 아들이 달력 뒷면에 끼적인 두서없는 낙서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훗날 아버지는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는 아들이 분리수거함에 버려둔 습작을 다시 책상 앞에 올려두며 “이 아이디어는 버리기 아깝다. 잘 간직해 둬”라고 말하곤 했다.

“남들은 쓸데없다고 여겼던 딴 생각을 아버지는 늘 귀하게 여겨주셨어요. 어쩌면 아버지 덕분에 제가 지금까지 남들과 다른 생각을 머릿속에 품고 살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매일 낙서만 하니 뭐해서 밥 벌어 먹고 살 것이냐’는 지적이 무색하게, 이제 그는 그 낙서로 엄청난 밥벌이를 한다.

그의 조그마한 그림 한 장이 3, 4년 동안 2만 명가량의 엔지니어를 움직인다. 페라리와 벤츠, 아우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최고의 차량들 내부 디자인을 맡아온 박찬휘 디자이너(45)가 지난달 27일 에세이 ‘딴생각’(싱긋)을 펴냈다. 그는 2005년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인회사 이탈리아 피닌파리나(Pininfarina)의 신입 디자이너로 첫 발을 내딛은 뒤 현재 독일의 전기차 회사 니오유럽디자인센터의 수석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박 디자이너는 2일(현지 시간) 전화 인터뷰에서 “이 책에는 내게 딴 생각을 선물해준 은인들이 나온다. 아버지를 비롯해 신차 발표회에 참석한 VIP 고객, 13세가 된 내 아이가 던지는 모든 질문들이 딴 생각의 원천”이라며 웃었다. 책 속에는 16년 동안 유럽 자동차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해온 그가 일상 속에서 떠올린 딴 생각들이 빼곡하다.

그는 사소한 질문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다. 몇 해 전 스위스에서 열린 VIP 고객 대상 전기차 공개회에서 윌리엄이라는 한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이제 전기차 밑바닥에 배터리 팩이 생겨버렸으니 내가 차 밑에 들어가서 아이와 무슨 추억을 만들겠느냐”고 불평했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하던 추억을 이제는 아이와 나눌 수 없다는 불만이었다.

전기차에 옛 부품이 사라지는 건 당연하다며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얘기였지만 박 디자이너는 달랐다. 윌리엄의 말을 곱씹어보다 수첩에 이런 메모를 남겨뒀다. ‘전기차를 만들더라도 차 아래에 뭔가 뚱땅거릴 수 있는 부분을 만들 수는 없을까.’

“실현 가능성과 관계없이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동차를 타고 그곳에서 추억을 쌓아나갈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볼 수 있어요. 다른 생각이라는 건 결국 내 주변 일상의 사소한 순간에서 나와요. 사소하고 이상하다고 지나쳐버릴 게 아니라 기록하고 곱씹어 생각해봐야죠.”


박 디자이너가 던진 사소한 질문은 언제나 자동차에 변화를 불러왔다. 왜 물병을 꽂아두는 보관함은 운전석 아래 놓여 있을까. 손 뻗으면 닿는 편한 자리에 놓일 수는 없을까. 고민 끝에 그는 아우디 신차 내부 디자인을 맡으면서 물병 보관함 자리를 운전석 손잡이 쪽에 제작했다. 자동차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하지만 보수적인 엔지니어들은 다시 원래 자리에 물병 보관함을 두자고 고집했다. 이렇게 그의 아이디어가 빛을 보지 못하고 폐기되려던 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신차 시승 테스트에 참여했던 고위급 간부단이 그의 시도에 별 다섯 개 만점을 준 것. 2021년 출시된 아우디 전기차 Q4 e-트론에는 그가 바꾼 사소한 변화가 녹아들어있다. 이 차를 타는 운전자들은 허리를 숙일 필요 없이 손을 뻗어 물병을 꺼낼 수 있다.

“16년차 디자이너가 되고 보니 결국에는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다 맞았어요. ‘상식을 의심하고 보편에 충실 하라.’ 제아무리 수백, 수천 가지 기술과 디자인이 쏟아지는 세상이라도 가장 기본적인 가치는 영원불멸해요.”



이소연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