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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 읽은 ‘안중근 조서’… ‘난중일기’처럼 인생 뒤흔들어”

입력 | 2022-08-04 03:00:00

장편 ‘하얼빈’ 펴낸 김훈 작가
하얼빈으로 향하는 일주일 여정… 젊은 안중근의 청춘-영혼 묘사
평생 꿈꿔온 작업 이제 마무리… 지금은 그 당시보다 더 절망적
안 의사를 그의 시대에 못 가둬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3일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김훈 작가. 그는 “안중근 의사는 희망의 목표를 갖고 싸운 사람”이라며 “당시 동북아시아 정세는 비극적이고 돌파구가 없어 보이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찾아 나가려던 게 안중근 의사”라고 말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안중근 의사(1879∼1910)를 논할 때 민족주의적 열정과 영웅적인 면모를 빼놓을 순 없죠. 하지만 저는 그의 청춘과 영혼, 생명력을 묘사해보길 소원했습니다. 안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1841∼1909)가 운명적으로 중국 하얼빈에서 만나 파국을 이루는 비극성과 그 안에 든 희망도요.”

젊은 시절, 소설가 김훈(74)을 뒤흔든 건 단 두 개의 글이었다고 한다. 하나는 짐작하듯 충무공 이순신 장군(1545∼1598)의 ‘난중일기’다. 전쟁과 국가에 대한 고뇌가 담긴 글을 여러 차례 탐독했고, 그 결과는 2001년 장편소설 ‘칼의 노래’로 탄생했다. 또 다른 하나는 일제가 안 의사를 취조한 뒤 남긴 조서 기록이다.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한 이토를 저격한 안 의사의 뜻이 명료하게 담긴 글은 오랫동안 작가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3일 출간한 장편소설 ‘하얼빈’(문학동네)은 청년 김훈이 오래도록 꿈꿨던 소망을 이룬 셈이다.

김 작가는 이날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밥벌이 하느라 바빴고, (안 의사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이 소설 쓰는 일을 미뤄 왔었다”고 털어놓았다. “지난해 몸이 아팠고 올봄에야 건강을 회복해 집필을 마무리했다”는 그의 얼굴은 다소 지쳐 보이면서도 홀가분함이 묻어났다.

“제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야기다 보니 소설로 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필생의 과업까진 아니고, ‘필생 동안 방치한’ 소설이라 보는 게 맞겠죠. 젊었을 때부터 쓰고 싶었던 소설을 이제야 발표하려니 식은땀도 나네요.”

‘하얼빈’은 안 의사가 거사를 실행하기 약 일주일 전인 1909년 10월 19일 무렵부터 이토를 저격한 26일 전후에 초점을 맞췄다. 안 의사와 이토가 각자 하얼빈으로 가는 행로와 과정을 3인칭으로 풀어냈다. 이순신 장군의 1인칭 시점으로 쓴 ‘칼의 노래’보다 더욱 절제된 화법이다. 김 작가 특유의 단문은 여전히 묵직하고 강력하다.

“올해 하얼빈에 가서 안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려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무산됐습니다. 그 대신에 안 의사와 관련된 자료를 계속해서 읽었어요. 현장을 답사했다면 훨씬 장악력을 갖고 자신 있게 글을 써낼 수 있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소설에서 김 작가가 “쓰면서 가장 신바람 났다”는 대목은 안 의사와 독립운동가 우덕순(1880∼1950)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허름한 술집에서 이토 저격에 대해 논의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거사의 대의명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는다. 그저 일상적인 대화를 하듯 앞으로의 계획만 건조하게 주고받을 뿐이다.

“시대에 대한 고뇌는 무겁지만 젊은이들의 처신은 바람처럼 가볍습니다. 청춘은 나이를 먹고 완성되는 세월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 순간 폭발적인 에너지를 지녀 아름다운 거죠.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대목은 안 의사의 가족을 다룰 때였어요. 안 의사는 면회 온 동생에게 ‘처에게 못 할 일을 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끔찍하고 거대한 고통을 뭉개고 갈 수밖에 없는 심정이 드러나죠.”

김 작가는 안 의사를 신화화된 영웅이 아니라 신념과 살인행위를 두고 고민하는 보편적인 인간으로 그린다. 이토 역시 우리에겐 악인이지만 자기만의 대의와 야만성을 함께 지닌 복합적인 인물로 묘사한다.

‘작가의 말’에는 “안 의사를 그의 시대 안에 가둬놓을 수는 없다”는 문장이 실렸다. 김 작가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초야에서 뒹구는 글쟁이가 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의 동양은 안 의사가 살았던 시대보다 더 절망적인 면도 있습니다. 미국과 대립하는 중국, 핵무기를 지닌 북한, 군사대국을 지향하는 일본…. (안 의사가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론’의 명분이 지금도 유효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