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힐링의 고장 ‘水려한 합천’ 카누 체험과 둘레길 산책 합천영상테마파크에서 시간여행 전쟁-화마 비껴간 해인사 팔만대장경
카누를 타고 황강 변 풍광을 즐기는 관광객. 강 건너편으로 대야산자락의 함벽루(오른쪽)와 연호사(왼쪽)가 보인다. 함벽루는 고려 때 세워진 누각으로, 조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함벽루 뒤 암벽에는 ‘涵碧樓’라고 새겨진 송시열의 글씨가 있다.
《합천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황강에서 늦더위를 보낸다.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수상 레저를 즐길 수도 있고, 강변을 따라 우리 근현대사 자취를 만나는 흥취도 있다. 황강 변에는 북악산자락 실물 청와대를 68% 크기로 재현한 청와대세트장을 비롯해 근현대의 유명 건축물과 거리 등을 조성해 놓은 합천영상테마파크가 있고, 합천이 고향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생가도 있다. 마치 그의 전기인 ‘황강에서 북악까지’가 이곳에서 재현된 듯하다. 최근 600년 만에 일반에 공개된 해인사 장경판전의 팔만대장경도 6·25전쟁과 빨치산 때문에 소실될 뻔했던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현장이다.》
○황강 명물 카누 타고 함벽루 감상
역대 대통령들을 배출한 생가는 대체로 관광 명소가 된다. 작년 11월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는 별개로 그가 태어난 합천의 생가(율곡면 내천리) 역시 사람들이 즐겨 방문하는 곳이다. 좋은 터에서 큰 인물이 난다는 정서 때문일 것이다. 황강 물줄기가 감싸주듯 휘둘러가는 지형에 있는 그의 생가는 조촐한 규모와는 달리 강한 권력과 무(武) 에너지를 내뿜는 터로 평가받는다. 생가 마루에 앉아 있다 보니 강력한 천기(天氣)에 어질어질 취하는 느낌까지 받을 정도다. 여름 힐링 산책 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는 합천호 둘레길.
○시공간을 초월한 시간여행 명소
합천영상테마파크의 도로 위 전차. 근현대 시대물을 촬영할 때는 실제 움직이기도 한다.
2004년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촬영하기 위해 만들어진 합천영상테마파크는 영화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함께 유명해졌다. 이후 ‘암살’ ‘써니’ ‘고지전’ ‘택시운전사’ 등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한 지상파 방송에서 세트장 한쪽 구간을 임차해 드라마를 촬영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합천군 관계자는 영화 및 드라마 촬영용 세트장 임대 수입이 짭짤하다고 밝혔다.
합천영상테마파크의 세트장은 작품 스토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게 특징이다. 관람객들은 드라마나 영화 속 명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건물과 소품 등을 찾아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드라마에서 가게로 선보인 일부 건물들은 실제로 관람객들을 상대로 식음료 등을 팔기도 한다. 당대의 의상을 빌려 입고 적극적으로 시간여행을 즐기는 MZ세대들도 눈에 띄었다.
영상테마파크 뒤편의 정원테마파크에는 실물 청와대를 재현해놓은 촬영세트장이 있다. 높은 지대에 있기 때문에 영상테마파크에서 모노레일(5000원)을 탑승해 올라가면 된다. 청와대가 등장하는 대부분의 영화와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대통령 집무실 의자에 앉아보거나 청와대 대변인 역할 놀이 등을 해볼 수 있다.
○화마에도 팔만대장경만 멀쩡한 이유
장경판전에 비치된 팔만대장경판. 경판 사이사이에 공기가 통하도록 미세한 틈이 있어서 습기를 막아준다.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판전 내 수다라전 통로에는 매년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과 추분에 연꽃 모양 그림자(아래)가 피어난다. 그림자가 바닥에 예쁘게 비치도록 철저한 계산에 의해 건물을 설계했다는 게 해인사 측 설명이다.
건물 벽 위아래에 크기가 다른 창틀을 만들어놓은 것도 특징적이다. 서남향 구조의 건물 남쪽 벽은 아래쪽 창틀이 위쪽 창틀보다 더 큰 반면, 반대편 북쪽 벽은 거꾸로 돼 있다. 이는 건물 지형과 바람 방향을 계산해 밤낮으로 바깥바람이 건물 내부로 들어와 공기를 잘 순환시키도록 한 것이다. 실제로 바람이 별로 없는 한낮의 땡볕 날씨임에도 남쪽 벽 창틀을 통해 시원한 바람이 수시로 불어왔다. 오늘날의 첨단 건축 기술로도 흉내 낼 수 없는 선조들의 지혜가 놀라웠다.
살기나 흉한 기운을 막기 위해 지붕에 결계(結界) 장치를 한 장경판전은 오래된 풍수 비방도 간직하고 있다. 불기운이 드센 지형의 해인사에서는 매년 소금 묻기 행사를 한다. 1년 중 양기가 가장 강한 단옷날에 바닷물(소금)로 화기를 누름으로써 화재 예방을 기원하는 행사다. 그런 원력 때문일까, 해인사는 1695년부터 모두 7차례 화재를 겪었지만 장경판전은 단 한 번도 화마(火魔) 피해를 입지 않았다.
장경판전은 6·25전쟁의 폭격에서도 살아남았다. 당시 가야산 자락 해인사는 빨치산의 주 활동무대였다. 아군은 이 일대를 초토화시키려 폭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공군 조종사 김영환 대령은 소중한 문화자산을 사라지게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명령을 어기고 폭격 대신 기관총으로 적들을 소탕했다. 해인사 앞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대장경테마파크에서 해인사까지는 ‘해인사 소리길’로 유명하다. 가을 단풍이 떨어지면 ‘흐르는 물조차 붉다’고 해서 홍류동이라 불리는 계곡을 따라가는 6.2km(2시간) 구간이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바람·새소리를 들으며 걷다보면 내면의 소리도 듣게 된다는 길이다. 여름철 힐링 명상코스로 좋다.
글·사진 합천=안영배 기자·철학 박사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