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건 신한은행 창업주 스토리 제과점 인쇄소 전전한 경산 촌놈. 서울 생활 반년 만에 청산 “일본에 가서 큰물에 놀고 싶습니더”
2022년 7월 7일 신한은행이 창립 40주년을 맞았다. 1982년 일본 전역의 재일교포 341명으로부터 돈을 모아 만들어진 신한은행의 탄생은 이희건(李熙健) 창업주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현해탄을 건너 제일 밑바닥 사환에서 시작한 그의 삶을 들여다 본 ‘여러분 덕택입니다. 신한은행 창업주 이희건 회고록’(나남)이 최근 발간됐다. 2011년 작고한 조선 청년 이희건의 불굴의 삶을 추적했다.
일제 강점기인 1932년 3월 경북 경산의 압량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희건(1917~2011)은 대구사범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러갔다. 희건은 시골에서 공부는 언제나 1등을 놓치지 않는 우등생이어서 교장 선생님은 학교의 명예가 걸린 일이라며 대구사범학교 진학을 권유했다. 담임인 다나카 선생은 시험일보다 열흘이나 앞서 학교 부근에 하숙집을 구해주면서 마무리 공부에 몰입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박정희와 운명적인 만남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받고 박정희 대통령과 기념 촬영한 모습. 서있는 사람 왼쪽에서 5번째가 이희건 회장. 1968년 3월 21일. 사진 나남
“박정희(朴正熙)? 나는 이희문(李熙文)이야. 남자 이름에 희(熙)자가 든 경우는 드문데, 우리 둘이 같은 방을 쓰게 됐으니 이것도 기막힌 인연이다. 그쟈?”
“너거 구미보통학교에서는 몇 명이나 응시하노?”
“일곱 명….”
“일곱이나? 나는 혼잔데….”
박정희와 이희문(나중에 이희건으로 개명)은 이렇게 만나 11일 동안 한 이불을 덮고 한솥밥을 먹으며 시험 준비에 몰두했다. 박정희는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비빔밥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할 정도로 공부에 열심이었다. 박정희는 간혹 휘파람을 불기도 했는데, 소리가 힘차고 맑아 듣기에 좋았다고 희문은 기억했다.
“그래 이 촌구석을 벗어나자!”
희문은 담임인 다나카 선생님과 진로를 상의한 끝에 선생님이 아는 서울의 제과점 주소를 받아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선생님은 지갑을 열고 돈을 꺼내 희문의 손에 쥐여줬다.
“경성에 가려면 깨끗한 옷을 입어야 한다. 이 돈으로 옷을 사 입고 차비로 써라.”
“선생님 은혜는 평생 안 잊겠심더!”
●제과점, 인쇄소 전전한 서울 생활
1947년 일본 오사카 쓰루하시 국제상점가연맹 발기인들과 함께.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희건. 사진 나남
희건은 대구 서문시장에서 파르스름한 양복을 사 입고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만 15세 때다. 대구역에서 저녁 6시에 타 이튿날 아침 6시에 도착했으니 꼬박 12시간 걸렸다. 행인들에게 물어물어 다나카 선생님이 소개해 준 충무로 제과점을 가까스로 찾았다.
“1등으로 졸업했다며? 나는 학교 다닐 때 내내 꼴찌 근처를 맴돌았어.”
니시모토 요시오 사장이 희건을 맞이했다. 난생 처음 보는 빵과 과자 종류는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카스테라 단팥빵 센베이…. 고향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희건이 제과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정작 그리 많지 않았다. 며칠을 지난 뒤 니시모토 사장이 말했다.
“자네는 아무래도 제과에는 적성이 맞지 않은 것 같네. 다른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부담 없이 여기 머물게.”
사실상 해직 통보였다.
그런데도 틈날 때마다 서점에 들른 희건은 서울에 오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종로2가 박문서관을 즐겨 찾았다. 시골에선 구경도 할 수 없는 책들이 서가에 즐비하게 꽂혀 있었다. 책값이 비싸 살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틈만 나면 서점에 와 서가 앞에 서서 책을 읽었다.
“책을 좋아하는 모양인데 무슨 일을 하냐?”
하루는 서점 주인이 물었다.
“제과점에서 점원으로 일합니다.”
“우리 서점에 인쇄소도 있는데, 거기서 일해보지 않을래? 책을 실컷 읽을 수 있지.”
일자리를 구하던 희건은 인쇄소로 일터를 옮겼다. 서점 맞은편의 종로 YMCA 뒤쪽이었다. 우선 잔심부름부터 했다. 인쇄한 책을 박문서관으로 옮기고, 지방으로 보낼 책 뭉치를 들고 서울역으로 갔다. 인쇄소로 원고를 갖고 오는 이광수, 염상섭, 현진건 같은 거물 소설가들을 먼발치에서 구경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 일본을 향한 꿈
이희건이 1947년 미 연합사령부를 찾아가 설득한 끝에 쓰루하시가 국제시장에 간판을 열고 상인들이 다시 문을 열어 장사를 할 수 있게 됐다. 사진 나남
1932년 9월 어느 날 희건은 갑자기 아버지를 여읜다. 서울에 있던 중에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고향으로 갔지만 야간열차가 도착한 때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향년 64세. 아버지의 임종을 못한 불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 첫 직장인 제과점의 니시모토 사장을 찾아갔다.
“일본에 가려고 합니다. 사장님 고향인 오사카에 가서 일자리를 구해보려고 하는데요.”
“오사카? 좋아! 내가 소개해 주는 곳에 가 일하면 밥은 먹을 수 있을 거야. 경산에 가서 다나카 선생님께 추천서를 부탁드리게.”
다시 경산에 간 희건은 졸업한 압량보통학교를 찾아가 다나카 선생님을 만나 취업추천서를 부탁했다.
“교장 선생님! 일본에 가서 큰물에 놀고 싶습니다.”
“그래, 지금 생각해보니 대구사범에 불합격한 게 전화위복이 되겠군. 자네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보다 다른 일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야. 오사카에서 뜻을 펼쳐보게나!”
희건은 교장선생님 추천서를 들고 대구경찰서에 가 도항(渡航)증명서를 발급받았다. 일본어를 불편 없이 쓸 수 있어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증명서를 쉽게 받을 수 있었다.
서당에서 배운 한시(漢詩)를 읊조리며 비장한 각오로 희건은 짐을 샀다.
“손바닥만한 논밭, 해마다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는 고향 땅, 상급학교에 진학하진 못했지만 평생 시골동네에서 살기는 싫어.”
●관부연락선, 현해탄을 건너다
재일교포 경제인 모국경제시찰단 모습. 앞줄 중간 안경 쓴 이가 이희건 회장. 사진 나남
1932년 11월 희건은 3630t급 관부연락선인 덕수환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부산항에서 945명을 태운 관부연락선 3등 객실은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평생 처음 타는 배는 몹시 흔들렸다. 배 멀미를 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속이 안 좋아 갑판에 나가 보니 사방이 망망대해(茫茫大海)였다.
이튿날 아침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한 희건은 도항증 검인이 있어 무사통과했다. 입국 절차는 부산에서의 출국 심사보다도 간단했다. 시모노세키에서 야간 열차를 타고 다시 오사카로 향했다. 모든 역에 서는 완행 열차는 오사카까지 15시간이나 걸렸다. 하지만 그에게 지루함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보면서 일본 땅에서 어떤 삶이 전개될지 궁금했다.
“여기가 내 인생의 새 삶을 개척할 일본이란 말이지? 그래 이제 시작이다!”
오사카에 도착한 희건은 충무로 제과점의 니시모토 사장이 알려준 곳을 찾아갔다. 외국인을 위한 사회복지기관인 오사카 게이메이회(啓明會)라는 사무소였다. 일본에서의 첫 일터, 희건은 여기서 잔심부름을 하는 사환으로 일하게 됐다. 문짝이나 책상, 의자가 고장 나면 도맡아 수리하고 건물 안팎을 청소하는 것이 주어진 일이었다.
나중에 재일동포의 돈을 모아 한국에서 신한은행을 만든 창업주 이희건의 일본 생활의 시작은 이처럼 밑바닥이었다.
롯데그룹 창업주인 고(故) 신격호 회장과 마찬가지로 희건이 일본으로 온 것은 가난한 고국에서 벗어나 대처(大處)를 향하는 모험심,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는 불굴의 의지, 몸을 아끼지 않는 성실성과 인내심, 땀과 눈물이 어린 노력이었다. 일본에서 맨 손으로 성공한 희건은 나중에 5살 어린 신격호를 만나 고객을 향한 뜨거운 애국심을 발휘하면서 불타오르는 의지로 투합한다(계속).
1946년 신혼 시절 아내 이쓰카게 미수와 함께. 두 사람은 만난지 석 달 만에 결혼했다. 사진 나남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