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광화문 앞 육조거리의 풍경. 임금의 행렬이 지나는 길이자 상소와 격쟁, 무예시험과 연희가 일어나는 광장이기도 했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전봉희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중심성이냐, 방향성이냐.’ 이것은 공공 공간의 성격을 가르는 주요 요소다. 길과 광장은 누구나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공 공간의 대표적인 두 가지 형태다. 6일 재개장한 광화문광장은 광화문 앞길로서 길과 광장, 중심성과 방향성을 오가며 우리나라 역사를 관통한 대표적 공간이다. 새로운 광장 앞에서 우리는 이 독특한 공공 공간의 궤적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만 해도 이곳은 육조거리였다. 임금의 행렬이 지나가는 ‘길’이자 상소와 격쟁, 무예 시범과 연희가 일어나는 ‘광장’이기도 하였다. 폭이 55m가 넘고 길이는 그 10배 정도 되는 이 공간은 돌로 만든 둥근 문을 세 개나 가진 당당한 광화문을 정면에 뒀다. 좌우로는 기와지붕이 반듯한 육조의 행랑채가 나란하며, 남쪽으론 종로로 이어지는 큰길과 낮은 언덕으로 가로막힌 큰 마당이었다.
대한제국기에 이르러 이곳에 크나큰 변화가 생긴다. 광화문 앞길이 네거리가 되면서 막힌 공간이 트이고 자체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인력과 중심성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정동에 자리 잡은 고종 황제가 삼거리로 막혀 있던 광화문 앞길을 덕수궁까지 연장하며 본격적인 물꼬를 튼 것이다. 광화문 입구를 네거리로 만들고, 그곳에 자신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칭경기념비전을 세웠다.
광복 이후 광화문 주변은 혼돈의 장이었다. 이념과 가치가 섞이고 충돌한 근대사를 빼닮은 공간이었다. 당시에도 총독부나 관저 건물이 좋아서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일본을 싫어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으로 중앙청 건물이 피해를 보자, 수리비를 핑계 대고 다시 사용하지 않았다. 이를 수리하여 다시 정부의 청사로 사용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의 일이다. 이후 여러 차례 국회 등에서 중앙청 사용의 불가함이 논의되었으나 그때마다 정부는 비용 조달의 어려움을 핑계 댔다.
군사정권은 광화문 주변에 새로운 권력의 색을 칠하려고 했다. 1971년 광화문에 설치된 철제 아치 선전탑이 대표적이다. 1980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당시 선전탑에 축하 문구와 사진이 걸려 있다. 동아일보DB
이러한 방향성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약화됐다. 광화문 일대의 공간적 성격이 다시 한번 크게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중앙청의 철거가 시작되어 1996년 완료되면서 광화문 앞길의 방향성은 크게 약해졌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약화된 권력 지향 위로 완전히 새로운 중심성을 대두시켰다. 수십만 인파가 몰려와 광화문 네거리에서 벌인 시가 응원전이 이 공간의 정체성을 일순 바꿔놓은 것이다. 대한제국 때 처음 만들어진 광화문 네거리의 너른 품, 개방적이고 자율적이며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중심성이 회복됐다. 회복을 넘어 강화됐다.
6일 재개장한 광화문광장 전경. 이전보다 면적은 2배 넓어졌지만 행사용 개방 공간은 많이 확보되지 않았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새로운 광화문광장에 부족한 것은 비움의 미학이다. 역사적으로 늘 그래왔던 것처럼, 광장은 비어있음으로써 채움을 대비하고, 그 채움의 색깔을 차별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어떠한 광화문광장을 원하는가 하는 질문은 곧 우리에게 서울은 누구의 도시인지를 묻는 것과 같다. 아니, 과연 우리가 누구인지에 관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권력을 향한 치열하고 냉혹한 방향성이 사라진 자리에 필요한 것. 그것은 진정한 비움, 따뜻한 포용으로 가득한 광장이다.
전봉희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