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예 태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무 고통도 없었을 테니까요.” 구약성서의 욥이 절망 속에서 했던 절규와 엇비슷한 내용으로, 김영하 작가의 소설 ‘작별인사’에 나오는 말이다. 화자는 이렇게 대꾸한다. “살면서 느끼는 기쁨도 있지 않아요?” 그러자 이런 답변이 돌아온다. “그 유익으로 고통의 해악이 상쇄될까요?”
흥미롭게도 이 대화는 인간과 유사한 신체를 가졌지만 로봇인 휴머노이드들이 나누는 대화다. 하나는 태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그래도 어딘가에 기쁨이 있을 거라고 한다. 이 대화에 유전자 복제로 태어난 클론이 끼어든다. “의식과 충분한 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이 세상에 넘쳐나는 불필요한 고통들을 줄일 의무가 있어요.” 어차피 태어났으니 다른 존재의 고통을 줄여주며 살자는 거다. 그리고 그가 보는 세상은 아름답다. 그는 겨울 호수를 보며 말한다. “그냥 얼음과 물일 뿐인데, 왜 이게 이렇게 가슴 시리게 예쁜 걸까? 물이란 게 수소와 산소 분자가 결합한 물질에 불과하잖아.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것을 아름답게 느끼도록 만들어진 걸까?”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그는 그 아름다움을 잠깐이나마 보고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래도 그들은 “이 지구에서 불필요한 고통을 압도적으로 생산해내는 존재는 바로 인간”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태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이 여기에서 나온다. 슬픈 귀납법이다. 그들의 생각은 작가가 밝힌 것처럼 윤리학자 데이비드 베너타의 저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에 나오는 생각들을 반복하고 변주한다. 소설은 그러한 생각들을 중심으로 묵시록적인 사유를 펼쳐 보인다. 조금은 어둡고 슬프고 허무적인 이야기다. 조금이나마 그것을 상쇄하는 것은 그러한 사유를 펼치는 작가의 눈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고통 속의 모든 존재를 향한 연민의 눈. 그러면서도 가슴 시린 세상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는 눈.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