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세상에 화(火)가 넘칩니다. 화는 마음에 불이 났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상하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화가 납니다. 화를 내야 상대에게 만만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의도가 작동할 때도 있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화를 내는지 널리 알기는 어려웠지만 이제는 사회관계망 서비스 등이 활용되다 보니 과장해서 말하면 온 세상이 다 알게 됩니다.
저도 살다가 보면 가끔 화가 나고 화를 냅니다. 분석을 받는 사람이 분석 시간에 제게 화를 내기도 합니다.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화는 피할 수 없는, 대면해야만 하는 감정입니다. 등급을 나눈다면 화, 분노, 격분 순서가 되겠습니다. 화를 기본으로 보면 분노는 ‘분개하여 몹시 성을 냄’이니 더 심한 중간급입니다. 표현 자체가 “화가 난다” 정도가 아니라 “분노가 끓어오른다”입니다. 격분은 ‘몹시 분개함’인데 “격분을 누를 길이 없다”이니 최상급입니다.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에도 화를 둘러싼 단어들이 다양해서 외국인과 대화할 때 살펴 쓰지 않으면 오해가 생깁니다.
화는 문자 그대로 불과 같아서 조심해서 다뤄야 합니다. 잘 쓰면 긍정적인 에너지로 생산적인 효과를 냅니다. 못 쓰면 자신을 태우거나 남을 해쳐서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평소 쉽게 느끼는 화라고 하는 감정이 기회가 되기도, 재앙이 되기도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화를 내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냉철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불타오르는 감정이 험한 말로, 험한 말이 공격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유턴’이 가능한, 멈출 시점을 아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처한 입장만을 세상에 널리 알리려고 고집하면서 엇나가면 되돌릴 기회는 영영 사라집니다. 사회관계망에 의존하다가 상대와의 관계가 오히려 파탄에 이른다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혹시 상대에게 화를 유발하면 전략적으로 이롭다고 생각하시나요? 상대가 넘어가서 맞불을 놓는다면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만,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상대를 만나면 이기지 못합니다. 심하게 화가 나서 격분의 단계에 다다르면 죽고 사는 일처럼 느낄 겁니다. 이때 기억해야 할 말은 세상에 정말 죽고 사는 일은 죽고 사는 일 자체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화를 참는 것이 약이 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일단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야 합니다. 스스로와 정직하게 대화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화를 내면 위험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분노 조절이 안 되면 주변 사람들이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깨달음이 없이 분노의 스위치를 켠다면 폭발과 파괴를 따르는 후유증을 앓아야 합니다.
상대가 의도적으로 화를 유발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까요? 일단 냉철해야 합니다. 상대가 화를 내며 비난을 퍼부어도 같은 식으로 반응하면 실책입니다. 모욕적인 언급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더라도 침착하게 묘수를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화내는 행태를 다른 방향으로 바꿀 방법을 구합니다. 그만 흥분해서 이성을 잃고 상대를 비난하며 화를 낸다면 상대가 스스로 피해자로 행동할 기회가 열립니다. 강하게 대응하는 방식은 별로 취할 점이 없습니다. 발끈한 마음에 적대적으로 달려든다면 상대는 쾌재를 부르며 방비책을 더욱 단단하게 세우고 다시 공격해 올 겁니다.
누구든지 화가 날 때는 화를 내는 것이 크고 작은 대의(大義)에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방해가 되는 행위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면, 현명한 사람은 늦기 전에 멈출 줄 압니다.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보여주지는 않으면서 화만 내는 사람은 특히 공적 영역에 걸림돌이 되어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생산성을 높이려고 하지 않고 호전성을 키우는 데 집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화를 내는 사람에게 그때그때 반응하는 것으로만 치우치면 내가 주도해서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을 할 에너지가 소진됩니다. 그러면 상대의 의도대로 가는 겁니다. 불태우려는 에너지에 휩싸이지 않고 목적지로 항해하려면 불을 막는 것에만 사로잡히기 전에 소중한 가치들을 제대로 지키면서 바람의 방향을 순풍으로 돌리려는 생각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