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바겐 전기차 ID.4
김도형 기자
유럽은 그동안 세계적인 전기차 대전환의 선두에 서 있었다. 탄소배출을 줄여 기후변화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2035년 내연기관차 판매금지 목표까지 내걸고 보급에 열을 올렸다. 지난해 유럽연합(EU) 국가들에서는 92만 대가 넘는 전기차가 팔렸다. 1100만 대가량인 EU 전체 자동차 판매량의 8.3% 수준이다. 자국 전기차 산업 육성을 중대한 산업 정책으로 추진해 온 중국(10.4%)보다는 낮지만 미국(3.3%), 일본(0.5%), 한국(5.9%)보다 훨씬 큰 전기차 판매 비중이다.
이런 유럽이 최근 전기차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있다. 독일 정부는 EU의 내연기관차 완전 판매금지 정책에 제동을 걸고 나섰고 전기차 보조금을 단계적으로 축소, 폐지하기로 했다. 영국은 이미 전기차 보조금 지급을 종료했고 전기차 천국으로 불리던 노르웨이도 전기차에 주던 여러 혜택을 줄이는 중이다.
전기차의 비중이 커지면 그동안의 혜택을 줄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수 있다. 하지만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의 ‘전기차 급제동’은 결국 전기차 산업의 패권 경쟁에서 유럽이 느끼는 위기감을 보여준다.
내연기관차 시대에 유럽은 메르세데스벤츠와 포르셰, 페라리 등으로 고급차와 슈퍼카 시장을 장악하고 대중차 시장에서도 폭스바겐이나 르노 같은 막강한 브랜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전기차 시장에서는 이런 ‘차포’를 떼고 한국, 중국 같은 후발주자와 경쟁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글로벌 전기차 판매량은 테슬라, 상하이자동차, 폭스바겐, 비야디(BYD), 현대차그룹 순이었다.
전기차의 핵심인 배터리를 살펴보면 유럽의 처지는 더 난처하다. 유럽에서 생산, 판매되는 전기차에 쓰이는 배터리를 생산하는 주요 기업은 모두 중국, 한국, 일본 기업이다. 리튬, 니켈, 코발트를 비롯한 배터리 소재 공급망마저도 주도권을 중국이 쥐고 있다. 내연기관차 시절의 경쟁 우위를 잃은 것은 물론이고 배터리 수급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 유럽이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하면서 전기차 시장을 적극적으로 키울 이유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전기차 패권 경쟁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미국은 최근 북미 밖에서 생산된 전기차를 보조금 측면에서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과시켰다. 미국에서 전기차를 팔려면 미국에서 생산하라는 압박이다. 전기차는 지난해 세계 자동차 판매의 5.8% 수준으로 비중을 키우며 차 산업의 핵심 축으로 자리를 잡았다. 조금씩 판이 짜여 가는 새로운 산업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세계 각국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