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동아일보 김태언 기자입니다.
미니멀 라이프가 유행이던 몇 해 전, 저도 집 정리를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의외로 미련이 많은 편이라는 걸 짐작했습니다. 중학생 때 샀던 캡 모자, 쓸모를 다한 피처폰, 공책 귀퉁이를 잘라 끄적였던 친구와의 쪽지까지. 무엇 하나 버리질 못하겠더라고요.
함께 한 시간이 오래였기에 더 소중했고, 낡았기에 더욱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결국 제 숙명(?)이라 생각하고 옷장에 모셔놓기로 했죠. 잃어버리는 게 아닌 이상 집안 어딘가에 영영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신의 기억을 보관합니다시오타 치하루
1. 시오타 치하루는 몇 번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신체의 유한함을 느꼈다. 대신 몸은 죽어 없어지더라도 인간의 기억은 영원히 우주 안에 존재할 것이라 믿게 됐다.
2. 그는 망자의 기억이 깃든 유품을 작품으로 만들면서 그 물건과 추억에 영원성을 부여한다. 그 유품 겉을 실로 둘러싸는 행위는 그 사물의 역사를 함께 써온 한 인간과의 관계를 가시화한 것이다.
3. ‘인연’을 의미하는 빨간색 실을 주로 사용해왔던 시오타는 이번 전시에서 흰색 실을 주로 썼다. 이는 한강의 소설 ‘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 삶을 구성하는 것, 기억.
시오타 치하루의 작품 세계는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됩니다. 시오타는 할머니의 무덤에서 잡초를 뽑던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 죽음과 마주하는데요. 두 번의 암을 진단받게 된 겁니다. 눈앞으로 다가온 죽음은 그를 하나의 생각으로 이끌었습니다.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의 답은 기억이었습니다.
“나에게 기억이 없다면, 나라는 존재를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내가 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기억에 대한 시오타의 애착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바꿨습니다. 비록 몸은 죽어 없어지더라도 나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의식과 기억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나아간 것이죠.
그 기억을 시오타는 사물에서 찾습니다. 사물의 낡고 닳은 부분은 그 사물과 사람들이 맺었던 관계의 흔적입니다. 시오타는 이들이 버려지면 그에 담겨있는 수많은 기억도 함께 사라진다고 생각했던 듯합니다. 그는 중고 시장에서 망자의 유품을 모아 작업합니다. 한 사물을 작품으로 재탄생시켜 영원히 이 세상에 살아있도록 한 것이죠.
시오타 치하루, State of Being (Window, Letter), 2022, 가나아트센터 제공
그가 거주하는 독일 베를린에는 사람이 죽으면 청소업체가 망자의 물건을 벼룩시장에 파는 문화가 있다고 합니다. 시오타가 가장 좋아하는 중고품은 가족사진. 그 외에도 러브레터나 옷처럼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겼던 물건들을 수집합니다. 물건의 주인들은 죽어 존재하지 않지만, 물건을 통해 그들의 존재감을 느끼는 거지요.
시오타 치하루, During Sleep, Performance and Installation, 스위스 루체른 쿤스트뮤지엄, 2002
“우리는 80년이라는 긴 생을 산다고 생각하지만 우주에서 계산해보면 인간의 삶은 1, 2초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요. 그 시간의 차이를 많이 느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소중한 물건을 수집해서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 결코 연약하지 않은 기억의 힘
누군가는 기억은 힘이 없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뚜렷한 이유 없이 어른어른해지는 어떤 기억들이 있지요. 그럴 때에는 기억이란 것이 마치 망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나약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오타의 ‘실’ 작업을 보면 그 생각에 조금 반기를 들게 됩니다. 어떤 물건이나 사람이 더 소중해지는 것은 관계와 그 관계 속 기억 덕분입니다.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고, 그래서 그 무게와 크기를 간과하기 쉽지요. 시오타의 실은 그 보이지 않는 영역을 보여줍니다.
시오타 치하루, The key in the hand,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2015
그가 붉은 실을 작업에 주로 썼던 건 좀 더 직접적인 표현이었습니다. 붉은 실은 동양 문화권에서 인연을 의미합니다. 오래된 인형 놀이 소품을 붉은 실로 엮은 작품을 보면, 잊은 줄 알았던 과거가 번듯이 떠오릅니다. 그 시절을 함께 해준 여러 사람과 물건이 지금 내 삶에도 묵직하게 자리한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귀중해지기도 하고요.
시오타 치하루, State of Being (Doll House), 2022, 가나아트센터 제공
물론 실은 엉키기도, 풀리기도, 끊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연약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시오타는 실질적으로 실이 당기는 악력이 굉장하다고 말합니다. 그가 전시 때마다 오직 실만으로 견고하고 압도적인 설치 공간을 만들 수 있는 이유기도 합니다.
○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그중에서도 이번 전시가 특별한 것은 실의 색에 있습니다. 가나아트센터의 한 전시장을 뒤덮은 실의 색은 ‘흰색’입니다. 시오타는 2020년 한강의 소설 ‘흰’을 읽고 감명받아 흰 실로 작업했다고 밝혔습니다.
시오타 치하루, In Memory, 2022, 가나아트센터 제공
소설 ‘흰’은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숨을 거둔 한강 작가의 친언니 이야기에서 출발합니다. 한강 작가의 어머니가 아이를 위해 준비했던 배내옷, 아이가 살았다면 먹었을 젖과 쌀죽과 같은 세상의 온갖 흰 것들에 대한 글이 수록돼있죠. 시오타는 임신 6개월 차에 양수가 터져 아이를 잃었을 때 이 책을 읽었고, 상당한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책 ‘흰’을 읽다 보면, 사람들을 애도하기 위해 밝힌 흰 초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그중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한강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흔들리거나, 금이 가거나, 부서지려는 순간에 당신을, 내가 당신에게 주고 싶었던 흰 것들을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누군가의 넋을 기리고 영영 기억하기 위해 흰 것을 바치는 것. 저는 시오타가 이 공간을 통해 하려는 말도 이와 비슷하다고 보았습니다.
시오타 치하루, In Memory, 2022, 가나아트센터 제공
당신의 육신은 사라져 없지만, 흰 실로 엮어놓은 옷가지와 엽서들을 보며 기꺼이 당신을 기억하겠다고.
아프고 불안한 현재를 사는 당신이 삶을 비관할 때, 당신에게도 분명 소중한 기억과 관계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여러분들은 기억의 바다를 헤매는 이 배 위에 올라 어떤 시간을 다시 반추하고 싶으신가요? 그 살아있는 기억들을 안고, 당신의 배는 어디로 항해하고 있는 걸까요?
전시 정보
In Memory가나아트센터(서울 종로구 평창30길 28)
2022.07.15~2022.08.21
조각 16점, 평면 38점, 설치 1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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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