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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올바름’ 앞세우다 사우디에 손절당한 미국·유럽 방산업계

입력 | 2022-08-21 10:26:00

빈 살만 왕세자 訪韓, K-방산 전차·장갑차·대공무기 수출 호기




한국 해병대가 운용하는 현대로템 K808 장갑차. [뉴스1]

인류 역사에서 명분(名分)과 실리(實利)는 종종 충돌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분은 정치 세력이 민심을 장악하고 움직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 명분이 특정 정치 세력의 이익엔 부합해도 국가와 국민의 실리와는 거리가 먼 경우도 많았다. 가령 조선왕조는 서양이 산업혁명으로 눈부시게 진보할 때 유교라는 틀에 스스로를 가둔 채 정쟁을 벌였다. 그 결과가 경술국치(庚戌國恥)였다. 조선을 망하게 한 명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현대 정치에서도 나타난다. 일부 정치인은 정의·인권·평등·도덕·사랑 같은 추상적 개념만 앞세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매몰된 나머지 국제정치에서 국익을 훼손하기도 한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와 갈등으로 방위산업에서 큰 손실을 입은 미국과 유럽 상황이 바로 그렇다.


사우디 실권자 ‘패싱’한 바이든 대통령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뉴시스]


사우디는 이슬람 국가지만 오랜 숙적 이란과는 달리 세계 각국과 활발하게 외교관계를 맺었다. 다만 최근 이익보다 명분에 집착한 일부 서방국가에 호되게 당한 탓에 외교적 고립을 면치 못하고 있다. 특히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 재임 시절 독일은 사우디 왕조의 인권 범죄를 문제 삼아 사사건건 대립했다. 사우디 측은 한때 파격적 규모의 독일제 공산품과 무기 구매라는 카드로 호의를 내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인권범죄자’와는 거래할 수 없다는 메르켈 정부의 수출 불허 통보로 800대 규모 전차 계약이 날아간 적도 있다.

영국은 1985년, 2006년 전투기 거래의 리베이트 사건을 문제 삼아 당시 사우디 실세이자 ‘아랍의 키신저’로 불리던 반다르 빈 술탄 왕자와 사우디 왕가의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를 수사하기도 했다. 사우디 왕실이 소유한 석유회사에서 나온 예산으로 영국제 전투기를 구매하면서 가격을 부풀려 차액을 조성하고 이를 일부 왕족이 ‘리베이트’로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는 영국 중대비리조사청 수사를 무마해 사우디와 방산계약을 유지했다. ‘정의’와 ‘실리’ 사이에서 200억 파운드(약 31조7000억 원)가 달린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산유대국이면서 전통적으로 미국의 중동 최고 맹방이자 최대 무기 수입국이던 사우디는 조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정책 때문에 미국에 등을 돌렸다. 지난해 1월 취임 직후 조 바이든 대통령이 사우디의 실질적 통치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의 도덕성을 문제 삼으면서 양국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바이든 대통령 취임 3년 전 발생한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에 빈 살만 왕세자가 개입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하게 했고, 취임 후 각국 정상과 연쇄 전화통화에서도 빈 살만 왕세자를 ‘패싱’했다. 앞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허가한 1100억 달러(약 144조 원) 규모의 무기 판매도 취소해버렸다. 빈 살만 왕세자가 반인권적 범죄에 관여하고 불법으로 왕위 계승권을 찬탈했다는 이유에서다.


美-사우디 관계 악화 결정타 사드 철수

한화디펜스의 비호-II 차륜형 대공포(왼쪽) 개념도. [사진 제공 · 한화디펜스]


악화된 양국 관계는 바이든 대통령 취임 7개월 만에 미국이 사우디에서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와 패트리엇 PAC-3 미사일을 철수시키면서 최악으로 치달았다. 미국이 방공 무기 철수를 시작한 지난해 8월 사우디는 안보에 중대한 위기를 맞았다. 예멘 후티 반군이 수도 리야드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 탄도탄 공격을 퍼붓고 이를 막을 패트리엇 미사일 재고가 바닥을 보일 때였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에 따르면 사우디에서 방공 무기를 모두 철수시킨 직후 미국은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보좌관을 사우디에 보내 석유 증산을 요구했다. 카슈끄지 암살 사건에 대한 문제도 제기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빈 살만 왕세자는 바이든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온 설리번 보좌관에게 고성을 지르며 화를 냈다고 전해진다. 결국 사우디와 미국의 관계는 계속해서 최악의 상황으로 추락했다. 이윽고 사우디는 중국,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하며 중동 정세의 새판을 짜기 시작했다.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 악화 결과는 최근 에너지 위기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유가가 폭등하면서 미국 경제가 인플레이션 위기에 직면하자 미국은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주도하는 사우디에 석유 증산을 요청했다. 사우디는 이를 단칼에 거절했고, 미국 주도의 대(對)러시아 제재에 참여하는 것도 거부했다. 미국에 대한 외교 보복에 나선 것이다.

결국 미국은 윌리엄 번스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급히 사우디에 파견했다. 휴양도시에서 휴가 중이던 빈 살만 왕세자를 찾아가 사과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 사우디로부터 석유 증산 수락은 받아냈지만, 이미 틀어진 양국 관계는 쉽사리 회복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정부가 사우디에 1년 동안 보인 적의는 이슬람 문화권의 ‘키사스(Qisas)’, 즉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통에 따라 되갚아야 할 원한으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빈 살만 왕세자는 번스 국장이 다녀가고 두 달 뒤인 7월 바이든 대통령을 직접 만나 면전에서 비꼬는 듯한 웃음으로 조롱했다. 카슈끄지 이슈를 꺼내 든 바이든 대통령에게 미군의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포로 학대 사건,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계 미국 언론인 시린 아부 아클레 기자 총격 사건 등을 거론하며 맞받아쳤다.

최근 사우디는 방산 분야에서도 미국과 관계를 전면 재설정하고 있다. 그간 넘쳐나는 오일머니로 미군 사양과 비슷한 최고급 ‘Made in USA’ 장비를 구입해 사용하던, 즉 미 방위산업의 최대 해외 고객이던 사우디가 무기체계 분야에서 ‘아메리카 디커플링’을 시작한 것이다. 이를 위한 포석으로 사우디는 2017년 빈 살만 왕세자 주도로 설립한 국영방산업체 ‘SAMI’(Saudi Arabian Military Industries) 육성 일정을 대폭 앞당기고 투자 규모도 크게 늘렸다. 2030년까지 전체 무기 구매 예산의 50%를 SAMI에 투자 및 지출한다는 전략이 특히 눈에 띈다. 사우디의 무기 국산화 프로젝트는 1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수준의 대사업이다. 당연히 해외 파트너 도움이 절실하다. 지금까지 오일머니로 먹고산 사우디는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과 산업 인프라가 있어야 유지·발전할 수 있는 방위산업 기반이 사실상 없다.


“사우디는 독일 무기 필요 없다”

국방과학연구소가 개발한 천궁 지대공미사일 발사 모습. [사진 제공 · 방위사업청]


세계 무기 시장의 큰손인 사우디의 움직임에도 미국과 유럽 주요 방산업체는 조용하기만 하다. 어떤 분야든 계약만 하면 한국 돈으로 조 단위 계약이 쏟아질 시장을 메이저 업체들이 외면하고 있다는 얘기다. 오히려 사우디와 별다른 접점이 없어 보이던 튀르키예나 파키스탄, 중국, 러시아 등이 나서서 사우디와 방산 협력 확대에 매달리는 모양새다. 특히 중국 행보가 적극적이다. 코로나19 팬데믹 내내 해외 순방에 나서지 않고 두문불출하던 시진핑 국가주석이 2년 7개월 만의 첫 해외 방문지로 사우디를 택하고 대규모 경제·산업·방산 협력을 천명할 전망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미국과 유럽은 키사스 원칙에 따라 사우디와 방산 협력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당신들(미국, 유럽)이 무기를 팔지 않겠다고 했으니 우리(사우디)도 당신네와 거래하지 않겠다”는 것이 사우디 측 심중이리라. 실제로 독일의 대(對)사우디 무기 금수 발표 직후 사우디는 무함마드 알투와이지리 당시 경제 차관(현 왕실 경제고문)이 “사우디는 더는 독일 무기가 필요 없다”며 독일제 무기를 구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독일제 무기 수입을 영구 중단한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메이저 방산업체들에는 ‘그림의 떡’이 된 사우디 방산 시장이 한국엔 ‘K-방산 유럽 교두보’ 폴란드보다 더 큰 기회가 될 수 있다. 당장 사우디 육군은 예멘 내전에서 생각보다 형편없는 성능으로 실망감을 안긴 600여 대의 M1A2S 에이브럼스 전차, 2선급 전력인 1300여 대의 M60A3 전차를 대체할 최대 2000여 대 규모의 차세대 전차 도입 계획을 갖고 있다. 노후화된 M2A2 브래들리 보병전투장갑차 400여 대와 M113 계열 3100여 대, AMX-10P 계열 300여 대 등 장갑차 3800대 이상은 물론, M109 계열 자주포 800여 문 등 폴란드에 견줄 만한 엄청난 잠재 수출 물량이 있다. 사우디의 방산 수요는 대공 무기체계나 해군 함정 분야에서도 적잖다. 면면을 살펴보면 M163 ‘발칸’ 자주대공포와 오리콘 GDF 대공포, 보포스 40㎜ 기관포, AMX-30SA 대공전차 등 300문 넘는 대공포와 호크·크로탈·패트리엇 PAC-2 계열을 대체할 수십 개 포대 규모의 방공 무기 소요가 존재한다. 사우디 해군은 미 제5함대 역할을 대신해 이란을 견제하고 페르시아만과 홍해 제해권을 확보하고자 대규모 구축함·잠수함 도입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차세대 무기체계 투자 유력 후보 사우디

한국은 사우디와 정치적으로 적대한 적이 없다. 사우디가 원하는 신뢰도 높은 첨단 무기체계 모델 라인업도 거의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사우디의 대규모 군사력 현대화·방산 육성 프로젝트의 가장 훌륭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약 2000대의 미국제 전차는 한국제 K2 전차로 대체 가능하다. 4000대에 가까운 장갑차는 마찬가지로 한국이 개발한 AS21이나 K808 같은 훌륭한 대안이 준비돼 있다. 300문 이상의 노후 방공포는 이미 비호-II 현지 기술 도입 생산으로 가닥이 잡혀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천궁 시리즈 방공 시스템과 한국형 구축함 기술에 대한 양국 간 협력 논의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잘만 하면 사우디라는 부국(富國)을 차세대 무기체계 개발의 든든한 투자자로 삼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올가을 예정된 빈 살만 왕세자의 방한(訪韓)은 사우디의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 ‘네옴시티’ 개발이나 원전 수출 같은 경제·산업 분야의 기회로 알려져 있다. 그뿐 아니라 최근 한국 방산업계의 쾌거인 ‘폴란드 잭팟’의 몇 배 이상 규모가 될지 모르는 ‘사우디 잭팟’의 기회이기도 하다. 미국과 유럽의 주요 방산업체들이 자국의 정치적 실책으로 스스로 놓쳐버린 기회를 한국은 잡아야 한다. 정부와 방산업계가 혼연일체로 힘을 모아 준비해야 한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353호에 실렸습니다》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