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불황인데 기업은 구인난… 한국도 ‘고용있는 침체’

입력 | 2022-08-23 03:00:00

제조업부터 IT업종까지 인력난
美-유럽도 팬데믹후 노동력 부족
산업구조 변화-청년층 감소 원인
한국, 日처럼 장기 저성장 빠질수도




“향후 10년간은 개발자 구인난을 면치 못할 것 같다.”

한국의 대표 정보기술(IT) 기업인 네이버의 한 관계자는 “핵심 경쟁력인 개발자의 시장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네이버는 그동안 국내외에서 인공지능(AI) 연구소를 인수하거나 대학과 공동 연구센터를 설립하는 등 인력 확보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또 전 세계에서 개발자를 모집하는 채용 설명회도 수시로 열었다. 그러나 국내에선 캠퍼스의 인력 양성이 산업구조 변화 속도를 못 따라가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해외로부터 근로자 수급도 꽉 막히면서 인재 영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서울 강서구 마곡동에서 호프집을 운영하는 이모 씨는 최근 최저임금에 해당하는 시급 9160원에 1300원의 웃돈을 주겠다는 알바 구인광고를 했지만 사람을 구할 수 없었다. 이 씨는 “일손이 모자라 영업에 차질이 심각하다”며 “그렇다고 사람 뽑자고 시급을 더 올리자니 식자재값이 크게 오른 상황이라 임차료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자영업자들은 아르바이트를 할 만한 젊은 사람 자체가 부족한 데다, 이들이 대면 서비스업도 기피하고 있다고 호소한다.

최근 전통 제조업과 뿌리산업, 자영업자·소상공인은 물론 IT 등 신산업까지 극심한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보통 경기가 둔화하면 고용도 함께 침체되지만, 요즘은 성장률이 떨어지며 경기가 침체되는 와중에도 실업률이 낮고 기업들이 구인난에 시달리는 이례적인 상황이다.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들에서 최근 관찰되고 있는 ‘고용 있는 침체(Jobful Recession)’ 현상이 한국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올해 성장률 전망치는 2%대 초반으로 지금도 계속 떨어지고 있지만, 실업률은 7월 기준(2.9%)으로 역대 최저치였고 고용률은 반대로 가장 높았다. 이런 상황이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청년인구 급감 및 일자리 미스매치 같은 구조적 요인이라는 지적이 많다.

저출산으로 인구 감소의 충격에 휩싸인 한국 경제는 기업들의 인력난이 가중될 경우 산업경쟁력이 떨어져 일본과 같은 장기 침체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세계화 후퇴와 고령화라는 큰 흐름이 겹치면서 전 세계적인 인력난은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며 “지금 위기를 돌파하지 못한다면 성장은 크게 제약되고 장기 저성장에 빠질 위험이 커진다”고 경고했다.



청년인구 감소에 “일할 사람 없다” 아우성…“장기적 저성장 우려”

[고용 있는 침체]‘불황 속 인력난’ 경제 동력 위태


팬데믹 계기 산업구조 변하는데 채워줄 인재 공급 제대로 안돼
코로나에 해외근로자 유입도 막혀
뿌리기업 2년새 2000개 사라져… 인력난속 저성장 악순환 우려 커져


경남 김해에서 용접 관련 부품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최모 씨는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 매번 납기 일자를 맞추지 못한다고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라는 긴 터널을 지나면서 기능 숙련공들이 빠져나간 반면, 주 52시간 근무제로 필요한 인력은 더 늘었기 때문이다.

최 씨는 “5년 전에 100명이 했던 일을 하려면 이제 130명이 필요한 상황이 됐다”며 “하지만 실제 쓸 수 있는 사람은 70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면서 “일할 사람이 없어 문을 닫는 업체들이 많다”고 했다.

지난달 국내 취업자 수는 1년 전보다 82만 명 이상 급증하며 22년 만에 가장 크게 늘었다. 실업률도 2.9%로 7월 기준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언뜻 보면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며 ‘일자리 호황’이라도 찾아온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성장률이 올해 2%대 초반, 내년에는 1%대가 예상되는 등 경기 둔화가 본격화되고 있어서다. 한국경제연구원도 22일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2.4%로 당초보다 0.1%포인트 하향 조정했다.

경기 침체 속 인력난에 직면한 기업과 자영업자들은 일손 부족에 비명을 지르고 있다. 제품 생산과 기술 개발 등 핵심적인 직군에서 근로자 채용이 어렵다 보니 구인난이 경영이나 영업에 타격을 주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 인력난이 저성장 부추기는 악순환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업종은 제조업과 뿌리산업, 신산업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있다. 최근 발주가 늘고 있는 조선업의 경우 상황이 유독 심각하다.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는 수주 물량을 소화하기 위해 올해 9월 기준 6만 명의 인력이 필요하지만 이 중 9509명이 부족할 것으로 전망했다. 내년 6월 예상되는 부족 인력은 1만1099명으로 늘어난다. 제조업의 근간이 되는 후방 산업도 취약하다. 국가뿌리산업진흥센터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말 뿌리산업 부족 인력은 9936명으로 나타났다. 국내 뿌리기업은 3만여 개로 조사됐는데 고질적 인력난으로 2년 새 2000개가 넘는 업체가 사라졌다.

미래 먹거리 산업도 일손이 부족하다. 한국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에 따르면 인공지능(AI)·빅데이터 등 주요 정보기술(IT) 분야의 지난해 인력 부족 규모는 9453명이었는데 올해 1만4514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IT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인도 등 신흥국에서 개발자를 데려올 수 있었지만 팬데믹 이후 해외 근로자 공급도 막혀버렸다”고 했다.

일할 사람을 구하기 힘든 건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도 마찬가지다. 서울 보문동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김모 씨는 “최저 시급으로는 서빙 등 보조인력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다”며 “4대 보험에 가입하고 근로 기간을 1년 이상 채우면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바로 관두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 인구 감소-팬데믹-규제 등 복합 원인

‘고용 있는 침체’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우선 팬데믹 등을 계기로 산업구조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데 이를 채워줄 만한 인재 공급이 되지 않고 있다. 특히 저출산의 여파로 베이비부머의 빈자리를 메워 줄 청년층 인구가 계속 줄고 있는 점이 현장의 구인난을 악화하고 있다.

코로나19 봉쇄와 세계화 후퇴에 따라 외국인 노동자 유입이 제한된다는 점도 근로자 부족의 큰 요인이다. 산업계 인력 공급을 제약하는 대학 정원 규제, 미래를 선도할 혁신산업이 부재하다는 점도 ‘성장 없는 고용’을 부채질하는 요소로 꼽힌다.

구직자들이 선호하는 ‘질 좋은 일자리’가 매우 제한돼 있다는 점도 문제다. 청년 실업자들이 괜찮은 일자리만 찾아 장기간 떠도는 일자리 미스매치 현상은 경제 전반의 성장 동력을 갉아먹는 요인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국내 기업들의 적극적인 구인에도 채용하지 못한 미충원 인원은 올해 1분기(1∼3월) 17만4000명으로 1년 전(10만2000명)보다 70% 급증했다.

○ 경기 침체와 노동력 부족 장기화 우려

다만 일각에서는 ‘고용 있는 침체’가 팬데믹 이후 전환기에서 나타난 일시적 현상이라는 분석도 있다. 경기 후행(後行)지표인 고용의 특성상 일자리도 경기 흐름에 따라 조만간 둔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통계청도 최근 고용동향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하반기 고용은 금리 인상과 경제심리 위축 등으로 증가 폭이 둔화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이 장기 침체의 문턱에 들어선 상황에서 ‘고용 있는 침체’가 새로운 경제 상식처럼 굳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한국은행 추계에 따르면 2016∼2025년 1.9%인 한국의 연평균 성장률은 2026∼2035년에 0.4%, 이후엔 0% 이하로 추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기간 고령화 추세는 가속화되면서 노동력 부족 현상은 더욱 심화될 소지가 높다.

불황 속 인력난이 장기화되면 한국 경제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답습할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일본은 내수 비중이 높아 장기 침체 국면을 견딜 수 있었지만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성장률이 떨어지면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장용성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과감한 노동 개혁과 산업 구조 재편을 통해 일자리 미스매치를 해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 고용 있는 침체(Jobful Recession) ::경기가 침체되는 상황에서도 실업률이 낮게 유지되고 기업들의 인력난이 심해지는 현상으로 최근 미국 등 선진국에서 주로 나타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각국의 경기 회복 과정에서 나타났던 ‘고용 없는 성장(Jobless Growth)’과 상반된 현상이다.

박민우 기자 minwoo@donga.com
이호 기자 number2@donga.com
박상준 기자 speakup@donga.com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