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전쟁으로 집을 떠난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전쟁이 6개월동안 이어지면서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 애타게 그리고 있다고 바르샤바의 AP 취재단이 22일 르포 기사를 전했다.
러시아군 침공으로 발생한 피난민은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최대이며 우크라이나 전 국민의 3분의 1이 집을 떠나 피난민이 되었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국내 피난민이 660만명 국외로 탈출해 유럽 전역에 거주하는 피난민도 660만명에 이른다.
유럽 국가들은 지난 해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난민들이 유입될 때 보였던 정치적인 반발 없이,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받아들여 보호해주었다.
독일은 우크라이나인들에게는 비자가 필요없다며 90만명 이상을 입국 시켰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들 중 몇 명이나 귀국, 또는 다른 나라로 이주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주일 뒤인 3월 8일에 남편과 헤어져 갖난 아기와 함께 폴란드로 피난해 온 타이시야 모크로주브는 전쟁이 곧 끝나고 5월이면 귀국할 수 있을 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고향 자포리자 부근의 원전에는 아직도 포격이 계속되고 있다. 전선이 너무 가깝다며 36세의 남편은 그녀에게 이제 생후 11개월이 된 아기와 함께 폴란드에 계속 있으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타이시야는 우크라이나가 겨울 쯤에는 러시아의 맹공을 이겨내고 승리하게 돼 자신도 귀국할 수 있을 거라는 꿈을 갖고 있다.
전쟁이 6개월 째를 기록한 지난 주 17일까지 이미 수십 만 명의 우크라이나 피난민이 귀국했다. 하지만 대다수 난민들은 폭격으로 돌아갈 집이 없어졌거나, 있더라도 당장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슬픈 현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난민들은 시간이 묶여서 정지한 듯한 느낌을 갖고 있다. 전쟁이 곧 끝날 것 같지는 않고 귀국하고 싶은 소원은 멀기만 해서, 아예 먼 장래 일은 생각하지 않고 현재만 생각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제 새 학기가 시작되는 데도 일부 난민들은 외국 학교에 아이들을 입학시켜서 학력이 뒤쳐질까봐 입학시키기를 꺼리고 있다.
난민 일부는 원래 갖고 있던 직업에 못미치는 일자리를 구해 일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여성들이어서 모크로주브와 같이 너무 어린 자녀를 가진 여성은 아예 취업을 하지못한다.
그녀는 “ 나뿐 아니라 모든 우크라이나 난민에게는 시간이 멈춰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종류의 지옥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바르샤바는 인구 180만명의 도시에 18만명의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들어와 살고 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단일 인구 집단이다.
또 우크라이나와 인접해 있어서 국방의 의무 때문에 피난하지 못한 남편이나 아버지를 만나러 잠깐씩 귀국할 수도 있다.
11세의 아들을 데리고 3월초에 드니프로에서 이 곳에 온 갈리나 이뉴티나(42)는 “우리는 더 멀리 피난할 생각이 없었다. 아들이 너무 멀리 가면 나중에 집에 가는 길이 멀어진다며 싫어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지금도 고향의 넓은 밭과 숲, 음식을 그리워하고 있다.
너무 많은 피난민이 도착한 바르샤바 시는 안그래도 주택난이 심한 데다가 방세가 지난해에만 30%이상 치솟았다. 피난민이 많이 온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이다.
전쟁 초기에는 수십 만 가구의 폴란드 가정이 생판 모르는 우크라이나 가족들을 집에 받아주고 숙식을 제공했다. 이처럼 환대를 해줘서 난민수용소는 필요가 없었다고 바르샤바에서 이민을 위한 우크라이나 센터를 운영하는 옥사나 페스트리코바는 말했다.
하지만 몇 달씩 시간이 지나면서 환대는 점점 약해졌고 폴란드 주민들이 이곳에 전화를 걸어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내보내기 위한 통역이 필요하다고 요청하는 건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 대신 대기업들이 지원에 나섰다. 지멘스는 폴란드 지사 건물을 호텔 스타일 숙소로 개조해서 바르샤바 시청의 도움으로 약 160명의 난민들을 수용했다. 깨끗한 시설에 식품과 세탁등 시설이용이 모두 무료이다.
새로 온 피난민의 숙소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일자리는 공산주의 시대 이후로 급속히 발전한 경제 덕분에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다.
6년전 우크라이나에서 이주한 올레흐 야로이는 부인과 함께 커피 프렌차이즈 업을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남성 직원들이 전쟁터를 향해 귀국했지만 지금은 우크라이나 말을 할 줄 아는 여성 피난민들이 임시로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고 말했다.
야로이는 “ 피난민의 절반은 귀국 만을 꿈꾸고 있어 폴란드어를 배우지 않는다. 어려운 도전 대신에 단순 노동 등 임시직만을 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아파트 임대업을 하던 테티아나 빌로스(46)도 야로이의 주방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러시아 침공 이틀 뒤에 바르샤바에 살고 있던 딸의 집으로 왔다. 남편이 그리워 2주일간 귀국했지만, 매일 공습경보와 폭격에 질려서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돌아갈지 말지 다음 행보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게 불확실하고 불안하다”는 다른 피난민들과 마찬가지로 현재만을 살고 있다고 했다.
난민들은 거리에 즐비한 시신들, 식수가 없어 눈을 녹여 먹었던 아픈 기억을 뒤로 하고 피난했지만 고국에 두고 온 가족들 때문에 매일 슬픔에 젖어 지낸다.
난민들 대부분은 피난 당시 혹시 죽게 되면 연락할 부모와 남편, 가족들의 연락처를 배낭의 바깥 포켓이나 몸 속에 쪽지로 적어서 간직하고 나왔다. 지금은 안전한 곳에 와 있는데도 대부분은 외출할 때마다 이 쪽지들을 꼭 몸에 지니고 다닌다.
두고 온 친구들과 가족들도 처음 몇 달은 언제 돌아오느냐는 문자를 많이 보냈지만, 지금은 그 질문은 사라졌다. 모두가 언제 돌아올지, 돌아올 수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피난민들은 말하고 있다.
[바르샤바( 폴란드)= AP/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