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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공 6개월…우크라는 어떻게 나라를 지켰나

입력 | 2022-08-25 17:37:00


러시아가 지난 2월24일 새벽 우크라이나 전면 공격을 시작한 지 만 6개월이 지났다. 전쟁 전 러시아가 순식간에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 정부를 전복시켜 괴뢰정부를 수립할 것이라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정치 신인이지만 용감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지휘 아래 압도적 화력을 가진 러시아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본격적인 반격을 준비하는 중이다.

전쟁 초기 벨라루스에서 자동차로 3시간 거리밖에 안되는 수도 키이우를 지켜낸 일은 지금도 거의 기적처럼 회자된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24일(현지시간) 키이우 방어가 어떻게 가능했는 지를 추적하는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100명 이상의 우크라이나 당국자들을 인터뷰한 끝에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고 분석했다.

자살공격 드론의 파편이 벨라루스 접경 우크라이나 국경 경비대 텐트를 덮쳤다. 키이우에서 3시간 거리밖에 안되는 벨라루스 국경지대 검문소 근무자들이 취침하던 곳이었다.

경비대 부지휘관 빅토르 데레우얀코는 온 몸에 화상을 입는 고통을 느꼈다. 얼굴을 훔친 손이 피로 가득했다. 철 파편이 팔과 복부를 관통해 심장 주변 근육에 박혔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감이 안잡혔다. 세번째 폭발이 있은 뒤에야 침대에서 굴러내려와 피할 곳을 찾았다. 폭발이 계속됐다”고 했다.

2월24일 새벽 4시15분이었다.

그보다 몇시간 전 데레우얀코와 동료 군인들은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다시 러시아의 전면 침공을 경고한 것을 두고 농담을 했다. 그런 그들이 첫번째로 공격을 당했다.

몇 분 뒤 러시아 미사일이 우크라이나 방공망과 레이더 기지, 탄약고, 공항, 군기지를 타격하는 전쟁의 소음이 새벽 시간을 가득 메웠다.

비슷한 시각 데니스 모나스티르스키 내무장관이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최근 며칠 새 그는 매일 아침 해가 뜨는 시각에 눈을 뜨면서 오늘도 러시아가 공격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휴대폰이 울린 것은 아직 어두운 때였다. 우크라이나 국경 경비사령관이 우크라이나 북동부 지역 3곳에서 러시아군과 교전하고 있다고 알렸다.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고위 당국자들이 예상했던 것과 달리 제한적 침공이 아니었다. 모나스티르스키 장관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작됐습니다”라고 보고하자 젤렌스키 대통령이 “정확히 어떤 상황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여러 곳에서 동시에 공격이 있는 사실로 볼 때” 키이우를 향한 전면적 침공인 것으로 보인다고 답했다.

모나스티르스키 장관은 뒤에 “처음 몇 분 동안 러시아군이 우리 방공망과 우리 군 전체에 가공할 공격을 했다. 누구라도 생전 처음 볼 것같은 너비 20m의 분화구가 생겼다”고 말했다.

모나스티르스키 장관은 당시 모두 “적들이 강력한 무력을 언제까지 휘두를 수 있을까”를 걱정했다고 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권력을 장악하거나 최소한 정부가 패닉에 빠져 도주하면 나라를 지키기가 어려울 것이었다. 러시아가 괴뢰 정부를 세울 것이었다. 러시아의 계획이 그랬다.

그러나 이후 36일 동안 키이우 주변에서 벌어진 상황은 22년간 러시아를 통치해온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처음 경험한 대외적 실패였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면서 유럽이 즉각적으로 반러 안보태세를 강화했고 냉전 이래 처음일 정도로 러시아를 고립시켰다. 키이우 공략에서 굴욕적으로 철수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고 수십억 달러를 투자해 재건해온 러시아군이 심각한 문제점을 가진 것이 드러났다.

러시아군의 작전에 허점이 많았던 것으로 드러나지만 키이우 전투는 사실 승패를 알 수 없었다고 해야 한다. 우크라이나군이 어떻게 방어했고 키이우를 지켜냈는지를 젤렌스키 대통령과 보좌관들, 우크라이나 군사령관들, 자원병들 미국과 유럽의 고위 정치 및 군 지도자들 100명 이상을 인터뷰해 키이우 방어 성공의 비결을 추적했다.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 결과 우크라이나 지도부가 전면 침공 가능성을 부인하는 와중에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의 초기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핵심 조치를 취했다. 지휘관들 스스로도 무슨 일이 벌어질 지를 확신하지 못했지만 병력과 장비를 기지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두었다.

우크라이나군은 무기와 탄약, 통신 장비가 부족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항전의지가 투철했다. 우크라이나군 병사는 물론 시민들과 무엇보다 대통령 자신이 그랬다.

우거진 숲, 좁은 도로, 꾸불꾸불한 강물 등 키이우 주변 지형은 우크라이나군이 게릴라전을 펴기에 유리했고 해빙기가 시작된 날씨도 러시아 장비의 진격을 막았다. 특히 키이우 서쪽의 천연 방어선인 이프린강은 우크라이나군이 댐을 파괴해 홍수를 일으킴으로써 키이우를 지키는데 활용할 수 있었다.

키이우 방어 성공에는 러시아 정부의 오판이 큰 역할을 했다. 우크라이나군의 사기와 젤렌스키 정부의 지속성,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저항의지를 알지 못했다. 결국 러시아군은 키이우 경계까지 진입하지도 못한채 몇 주 동안 주변지역에서 머물다가 철수했다.

전쟁이 벌어질 당시 푸틴은 760㎞ 떨어진 모스크바에 있었다. 검은 양복에 고동색 넥타이를 한 차림으로 나무 책상 앞에 앉은 모습으로 TV 연설을 하면서 우크라이나의 “탈군사화 및 탈나치화”를 위한 “특별군사작전”이 시작됐다고 발표했다. 푸틴은 러시아가 “지금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지 않으면 러시아를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연설이 마칠 때쯤 키이우 전역에 폭음이 울렸다. 올레나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영부인이 몸을 돌리자 침대 옆 자리 남편이 없었다. 남편은 잿빛 양복에 흰 셔츠를 입은 차림이었다. 넥타이는 매지 않았었다.

“무슨 일이예요?”라고 묻자 젤렌스키가 “시작됐어”라고 했다. 17살과 9살 난 자식들 얼굴을 유심히 보다가 사무실로 갔다. 젤렌스키는 러시아 미사일이 “자기 자식들, 모두의 자식들”을 덮칠 것이라는 생각, 수많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목숨을 일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몇 달 동안 피해자인 척 국제사회를 향해 거짓말을 해온 러시아 정부의 거짓 외교가 도무지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크라이나 국민 모두가 같은 생각이고 맞서 싸울 것이라고 확신했다.

젤렌스키가 보좌관들을 소집했다. 경찰과 국방을 담당하는 정부부서가 키이우를 사수하고 다른 부서는 서부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모두 러시아군 탱크와 장갑차 수백대가 2차 세계대전 당시처럼 행렬을 이뤄 국경을 넘는 국경 경비 카메라 영상을 보면서 경악하고 있었다. 북쪽으로는 벨라루스에서, 동쪽으로는 러시아에서, 남쪽으로는 크름반도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모나스티르스키 장관은 “지도 전체가 빨갛게 물들었다”고 했다.

러시아군은 체르노빌 원전 방사능 지대로도 진입했다. 우크라이나 국경수비대장 비탈리 야보르스키는 뒤에 러시아군이 이 지역 방사능 오염 지역에서 참호를 파고 인근 숲에서 오염된 사슴을 사냥해 먹었음을 알 수 있었다.

침략자들은 드녜프로강 위로 황금빛 돔 지붕이 빛나는 수백년 대도시 키이우를 점령하는 것이 목표였다. 중세 키이우를 점령했던 노브고로드 공국의 올렉이 “최초의 러시아 도시”라고 불렀던 이 도시는 러시아와 역사를 공유하기에 푸틴이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부정하는 근거로 악용했다. 푸틴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한 민족이며 소련의 조작과 서방의 개입으로 분리됐다며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전쟁에 나서는 근거로 삼았다.

키이우에 아침이 밝아오자 젤렌스키가 전화를 붙잡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바이든 대통령,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등 각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몇 시간 뒤 책상 앞에 앉아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향한 연설을 직접 녹화했다. 키이우는 절대 공격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수백만명이 폭발소리에 충격을 받고 자동차에 급히 오르고 있었다.

“모두에게 침착할 것을 요청합니다. 가능하다면 집에 머무르세요. 우리와 군이 대응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체 안보 및 국방 부분이 대응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뒤 그날 오후에 다시 평소처럼 소통할 것이라면서 우크라이나 국민들 모두 힘을 잃지 말도록 당부했다. “어떤 일에도 준비가 돼 있다. 누구라도 물리칠 것이다. 신이여 우크라이나를 도우소서”라고 했다.

키이우 중심부 정부 건물 지역에 있던 젤렌스키 비서실장 안드리 예르막의 휴대폰이 울렸다. 크레믈린에서 걸어온 것이었다.

엔터테인먼트 변호사 출신으로 젤렌스키의 최측근인 그는 전화를 직접 받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전화가 다시 울렸고 그가 받았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푸틴 최측근이 된 지 오래된 푸틴의 부비서실장 드미트리 코작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크라이나가 항복할 때가 됐다고 했다. 예르막이 욕을 하자 전화를 끊었다.

책을 읽기 좋아하고 생각이 많은 올렉산드르 시르스키 중장은 모든 상황에 대비하는 꼼꼼한 지휘관이었다.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하는 상황에도 대비했다.

최강의 군대조차 감당하기 힘든 키이우 시가전이 푸틴의 초기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은 없었다. 군 지휘부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 및 러시아 지원 우크라이나 동부 반군과 싸워본 경험이 있는 시르스키 중장은 러시아 침공 직전 우크라이나 국방 책임자에 임명됐다. 그는 “러시아 지도부가 대규모로 파괴적인 공격을 가해올 것이라고는 솔직히 말해 상상도 못했다”고 했다. “공격이 동부의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지역 내거나 주변 지역에서 시작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그러나 우리는 군인이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무관하게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접경에 집결한 러시아군대를 감안해 시르스키 장군은 러시아군이 키이우를 공격해올 경우 키이우내 정부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기갑부대가 빠르게 진격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고속도로 2,3곳을 통해 진격할 것으로 예상했다. 러시아군은 젤렌스키와 장관들이 키이우를 탈출한 뒤 혼란 속에서 키이우 수비대가 소수 취약한 병력만 남아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시르스키 장군은 키이우 방어선을 외곽과 시내에 2중으로 구축했다. 외곽 방어선은 최대한 멀리 배치해 키이우 중심지에 대한 포격을 할 수 없게 하고 진격하는 러시아군이 계속 전투를 할 수밖에 했다.

또 방어 구역을 나눠 군교육센터의 장군들에게 방어를 맡기고 각급 부대와 보안 부대에 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명령체계를 구축했다. 어떤 전술을 펼지는 현지 지휘관들이 사령부와 상의없이 내리도록 했다.

침공 1주일 전 우크라이나군의 모든 지휘부가 러시아군 진격 예상로 주변 야전 지역으로 이동했다. 시르스키 장군은 또 헬리콥터와 전투기, 주요 기지 등 항공 자산을 공습을 피할 수 있도록 이동시켰다.

그러나 탱크 전력은 72 기계화 연대 1곳만 수도 방어에 투입할 수 있었다. 키이우처럼 대도시를 방어하는데는 턱없이 부족했다. 대안으로 모든 군교육센터에서 임시 대대를 편성해 훈련에 사용되는 모든 포격 장비를 가지고 수도 주변으로 이동하도록 조치했다.

키이우 남동부의 키비츠키 훈련센터에서는 퇴역했던 소련시대 무거운 탱크 2S7 피온도 가져왔다. 203㎜ 자주포를 탑재한 46t의 이 거대 장비는 110㎏ 포탄을 30㎞까지 발사할 수 있다.

시르스키 장군은 포병을 러시아군의 진격로로 예상되는 키이우 외곽 북동부와 북서부에 포진시켰다.

복싱 챔피언 출신 비탈리 클리슈코 키이우 시장은 하마터면 큰 일날 뻔했다고 했다. 러시아군이 초기에 기지부터 공격했다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군은 일어날 걸 알았다”고 했다.

우크라이나는 이같은 준비를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미군 고위 당국자는 미국이 러시아의 침공계획을 우크라이나군의 방어계획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어서 우크라이나가 어떻게 방어할 수 있을 지 걱정했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이 전쟁 가능성을 부인하는 터여서 우크라이나 군이 대비계획을 알려주길 꺼렸다고 했다.

올렉시 레즈니코우 우크라이나 국방장관은 자신도 전면 침공이 있을 것을 믿지 않았다고 했다. 유럽 당국자들이 미국과 영국 생각과 달리 전면 공격 위험이 없다고 말했었다. 우크라이나 정보 기관도 러시아가 키이우를 점령할 만큼의 병력을 국경에 집결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2월22일 레즈니코우 장관이 빅토르 흐레닌 벨라루스 국방장관과 통화했다. 그는 벨라루스내 러시아군이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군인으로 약속한다고 장담했다고 했다.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 했다.

이틀 뒤 침공이 시작된 뒤 두 사람이 다시 통화했다. 상대편이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흐레닌은 자신이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의 말을 그대로 전했을 뿐이라면서 우크라이나가 항복하면 침공을 멈출 것이라고 했다. 레즈니코우 장관은 “러시아측의 항복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고 답했다.

러시아군 헬기가 드녜프로강 위로 저공비행을 했다. 벨라루스에서 강폭이 넓어져서 우크라이나인들이 바다라고 부르는 호스토멜까지 날아왔다. 우크라이나 정부 건물에서 북서쪽으로 35㎞ 떨어진 지점이었다.

Ka-52 공격용 헬리콥터 편대가 앞장서 안토노우 공항에 사격을 가했다. 큰 활주로가 있는 화물기 및 시험비행용 공항이었다. 푸틴이 키이우를 공격한 것은 윌리엄 번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1월12일 키이우를 방문해 푸틴이 공항을 교두보로 삼을 것이라고 경고한 대로였다.

공항 정문 외곽의 경비대 지휘관 비탈리 루덴코가 못믿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끝까지 믿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던 것같다”고 했다.

키이우에서 군 지휘부가 지하 벙커로 이동했다. 군 전령들이 군서열 2위의 예우헨 모이슉 소장을 찾아서 공격 당하는 마을 주민들에게 어떻게 전해야할 지를 물었다. 그가 몇바퀴 돌면서 생각하더니 “침략자들을 죽여라라고 모두에게 알려라. 죽여버리라고”라고 했다.

초기 호스토멜 공항을 방어하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방공부대가 선제 공격을 당해 러시아군 수송기 착륙을 막지 못했다. 공항 직원 중 한 사람의 아들이 러시아 정보요원이 돼 방공부대 위치를 알렸다고 시르스키 장군이 밝혔다.

기지내 전투 경험이 많은 병력들은 몇 주 전 동부 루한스크로 차출됐다. 무장과 함께였다. 공항에는 300명의 병력만 남았고 이들중 많은 수가 의무복무중인 징집병이어서 전투경험이 없었다.

우크라이나 수비 소대장 말리슈가 “보이는 건 모두 사격했다. 건물이든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가리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 모두를 쏘아댔다.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움직임이 보이면 무조건 사격했다”고 했다.

활주로에 헬기가 나타나자 경비대 세르히 팔라튝(25)이 소련제 이글라 견착 지대공미사일을 발사했다. 빗나갔다. 팔라튝이 재장전하고 다른 헬리콥터를 향해 발사했고 명중했다.

이 사건이 말리슈 소대의 징집병들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모두가 “헬기를 쏴 떨어트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침공 하루전 우크라이나 방공 부대가 이동했다. 덕분에 러시아군의 타격을 피할 수 있었고 몇 분만에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고 시르스키 장군이 밝혔다. 러시아 헬리콥터 편대장이 지대공 미사일 공격을 받아 전사하면서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다고도 했다.

수십명의 공항 민간 직원들이 구내 식당 지하 방공호로 대피했다. 하수구로 대피한 사람도 있었다.

공항에 러시아 수송헬기가 줄을 이었고 이들이 우크라이나군을 계속 사격했다. 무장도 탄약도 부족한 상태로 전쟁 경험이 풍부한 러시아군을 맞상대하던 국방경비대원들의 탄약이 바닥나면서 루덴코 중대장이 퇴각 명령을 내렸다. 공항 울타리를 뛰어 넘으라고 지시했다. 차를 타거나 뜀박질로 탈출했고 일부는 포로가 됐다.

퇴각 뒤 우크라이나군이 공항을 집중 포격해 활주로를 파괴했다. 24일 오후 늦게 우크라이나 공군 Su-24 전투기가 활주로를 폭격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교두보를 확보하는 건 막지 못했다.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 발레리 잘루즈니 장군이 72기갑연대장 올렉산드르 우도비첸코 대령을 호출해 호스토멜 공항 탈환을 명령했다. 우도비첸코 대령이 ”죄송하지만 그럴 전력이 못됩니다“라고 답했다. 잘루즈니 총사령관이 ”시도는 해봐야 한다“고 재촉했다.

72연대가 다른 부대와 함께 며칠 동안 공항을 포격해 러시아군이 공항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러시아군은 Il-76 화물기로 중장비와 병력을 투입할 계획이었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시르스키 장군은 ”러시아군이 몇 시간 만에 공항을 공격해 장악했지만 활주로 및 계류장을 공격해 착륙을 저지함으로써 키이우 점령을 방해했다. 뒤에 적들이 키이우 점령을 하는데 3일분 보급만 갖췄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러시아군은 뒤에 공항을 통해 병력과 보급을 보강할 수 있었다.

이후 며칠 동안 러시아 지상군이 부차, 이프린 및 호스토멜시를 점령했다. 키이우로 가는 길목의 도시들이었다. 그러나 일주일 뒤에도 호스토멜에서 시가전이 이어졌다. 호스토멜에서 벨라루스 국경까지 70여㎞에 달하는 보급 행렬이 이어지면서 러시아군의 보급 문제점을 노출했다. 3월7일이 되서야 러시아군이 호스토멜 대부분을 점령하고 공항을 보급 기지로 사용했다.

잘루즈니 최고사령관이 72연대장에게 러시아군이 수도로 진격하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명령했다. ”한 발짝도 물러서지 말라“고 했다.

우크라이나군이 고속도로를 통한 러시아군 진격을 막았고 러시아군이 숲을 돌파하려고 나섰다.

침공이 시작된 지 몇시간 동안 젤렌스키 대통령이 소련시대 만들어진 뒤 거의 손보지 않은 벙커의 탁한 공기속에 있었다.

국가안보방위위원회 의장 올렉시 다닐로우가 대통령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협력국들 모두 우리가 어려울 것이고 성공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지를 지켜볼 것이기 때문에 단기에 많은 지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다닐로우 의장은 러시아가 젤렌스키 대통령을 살해 또는 체포할 계획이 있다고도 했다. 최소한 주변에 무기를 소지한 사람들이 충성을 다하는 사람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면서 피신할 지는 대통령이 정하라고 했다.

다닐로우 의장은 피신에 ”깊이 생각하라“고만 했지 피신을 권하거나 말리지 않았다. 두가지 모두 ”큰 위험이 따른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피신하라고 했다. 경호대장이 일단 수도 외부의 안전한 장소로 옮겼다가 뒤에 서부로 옮기도록 권했다. 벙커조차 안전하지 않았다. 출구를 봉쇄하고 가스를 살포할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다.

러시아 정부는 젤렌스키가 피신할 것으로 믿었다. 8년전 러시아 지원 우크라이나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키이우에서 친유럽 시위가 벌어지자 모스크바로 피신했었다. 미국이 지원한 아슈라프 가니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지난해 카불을 탈출했었다. 러시아 지도자들은 44살의 희극배우 출신 젤렌스키 대통령을 탱크 앞에서 무너져내릴 약한 사람으로 판단했다.

며칠이 지나면서 젤렌스키 군사보좌관 올렉시 아레스토비치는 우크라이나군이 키이우 방어에 실패할 것으로 확신해 ”군사문제를 잘 아는 사람들이 못버틸 것이라고 한다“고 보고했다.

결국 젤렌스키 대통령이 버럭 화를 내면서 말했다.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더이상 듣고 싶지 않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다닐로우 의장에게 다른 중요한 내용이 없다는 더이상 자신을 노린다는 경고를 하지 말도록 명령했다. ”나도 사람이다. 죽고싶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면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했다.

초기 며칠 동안 젤렌스키는 초긴장 속에서 지냈다. 시험을 보는 어린아이처럼 손에서 딸을 흘렸고 레즈니코우 국방장관이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탈진했다며 의사를 만나보라고 권했다.

미국과 유럽 정부가 정부를 보존하기 위해 수도를 떠나라고 권하기도 했다. 그래야만 권력 공백을 피할 수 있다는 설득이었다.

그는 정반대로 판단했다. 피신한다면 우크라이나의 권력 중심부를 싸워보지도 않고 러시아군에 내주는 꼴이며 정부가 즉각 붕괴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대통령이 도망쳤는데 군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젤렌스키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유지하는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서방을 향해 ”권좌를 지키려 하지 않는다. 내가 피신해 유혈극을 멈출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겠다. 피신하면 전쟁이 끝나느냐고 묻겠다“고 했다.

일부 외국 중재자들이 우크라이나 정부가 항복해 전쟁이 최대한 빨리 끝나기를 바란다고 의심했다.

”내게 전화한 사람들중 우리가 버틸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우크라이나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악한 러시아 연방 지도자, 그의 권력과 생각, 러시아군의 힘 과시 때문이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는 죄송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2,3일 아니면 5일이면 모든 게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처음부터 필요한 지원을 확보하는데 집중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저항은 물론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보내고 러시아에 대가를 치르게 할 외국 지도자들의 지원이 필요했다.

유럽 지도자들과 화상 통화에서 ”이번이 내가 살아있는 걸 마지막으로 보는 것일 수 있다. 우크라이나 어머니들이 자식들이 유럽 가치를 추구하면서 죽어가는 걸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유럽 당국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젤렌스키는 영감을 자극하고 분통을 터트렸다. 특정 국가 지도자들과 대화하면서, 자국민들에게 호소하면서 자기 정부의 약점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에게 ”장벽을 허물어달라“고 했고 러시아가 유럽을 다시 분할하려한다고 했다. 독일 정치인들을 향해 최선을 다해 ”전쟁이 끝난 뒤 부끄럽지 않도록 해달라“고 했다.

예르막 비서실장이 이후 몇 주동안 숨진 우크라이나 어린이들과 주택 사진을 전세계 당국자들에게 보냈다. ”이 사진들 때문에 밤잠을 못이룬다“고 썼다. 사진을 받아본 사람들의 ”90%가 전화를 걸어 더 많이 돕겠다“고 했다.

정부가 게릴라전을 위해 무기를 나눠주기로 한 지 며칠만에 총을 잡아본 적이 없는 모든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총을 받았다. 군사 지도자들이 이를 서둘렀지만 뒤에 오인사격이 발생해 군작전에 방해가 되기도 했다.

모나스트리스키 내무장관이 러시아군을 ”억제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우크라이나 변절자에 대한 경고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변절하려고 생각하는 시장 누구라도 밖에 총을 가진 사람 20명이 기다리는 것을 알면 ”자신과 가족이 먼저 대상이 될 것으로 생각할 것“이라고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일반 시민들의 결연한 의지가 러시아가 원하듯 우크라이나를 유럽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러시아는 우리가 잘라내야하는 맹장처럼 보이겠지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맹장이 아니라 유럽의 심장임이 밝혀졌다. 우리가 심장이 계속 뛰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2월25일 밤 키이우 중심부에서 총성이 울렸고 체첸 군인들이 젤렌스키를 암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벙커에너 나와 대통령궁 앞 도로에서 카메라를 향해 자신은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뒤 가로등이 꺼진 곳에 총리, 정당 당수, 비서실장, 보좌관들이 도열했다. 총리가 휴대폰을 켜 지금 시간과 날짜를 보였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우리 모두 여기 있다. 우리 군대도 이곳에 있다. 시민 사회가 있다. 우리 모두 이곳에 있다. 우리는 우리 나라의 독립을 지키는 중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숲과 강, 호수에 둘러싸인 인구 1500명의 모슈춘마을은 주말에 오는 전문직과 현지 주민들이 별장을 두고 있는 곳이었다.

72 기계화연대의 중대장 로만 코발렌코 대위가 2월27일 마을에 도착했을 때 주택들은 불타고 있었고 주민들은 대피하고 있었으며 하늘에서 비행기가 추락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앞서 가던 소대장 한 사람이 피격돼 전사했다. 러시아 정찰대가 막 모슈춘에 도착한 것이었다. 며칠 뒤 마을에는 민병대 몇 사람만 남았다. 이곳은 키이우에 인접한 전략 요충이었다.

모슈춘은 호스토멜과 이프린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고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치고빠지기 공격과 부교에 대한 포격을 당하면서 물자를 이곳까지 간신히 옮겼다.

코발렌코 대위는 쌍둥이 형제 드미트로와 함께 72연대 중대장이 됐다. 36살인 두 사람은 동부 돈바스에서 전투경험이 풍부했다. 두 사람이 키이우 반대편에서 포진했다. 로만은 북서쪽, 드미트로는 북동쪽이었다.

이프린강 주변에서 포격과 전투가 며칠 동안 계속됐다. 3월6일 아침 러시아군 여러 명이 마침내 강을 건넜다. 코발렌코 중대가 근접전을 벌이며 반격했다. 그러나 얼마안가 탄약이 바닥났고 마을 센터로 퇴각했다. 그곳에서 우크라이나 특수부대 등과 합류했다. 일부는 미국이 지원한 재블린 대전차 미사일을 가지고 있었다. 또 외국 전사들도 있었다.

러시아 그라드 다연장 로켓, 대포, 박격포, 공습, 드론 공격, 헬레콥터 기관총 사격이 그들 참호를 집중 공격했다. 러시아군의 전파방해로 통신이 두절돼 드론을 띄울 수가 없었다. 코발렌코 대위는 부대원들과 연결이 두절된 채 마을에서 북쪽으로 10㎞ 떨어진 마을에 주둔하고 있었다.

코발렌코 대위는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이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계속 싸웠다고 했다. 며칠 동안 전투를 벌여 탈진했지만 폭탄도 드론도 헬리콥터도 신경쓰지 않았다. 추위도 눈도, 비도 개념치 않고 진흙탕에 누워 한두시간씩 잠잤다고 했다.

코발렌코 대위는 러시아군의 포격을 몇 분 동안만이라도 멈추도록 하기 위해 아군 포병에 연락하려고 시도했다.

당시 키이우 주변에서 며칠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우크라이나군은 152㎜포탄이 바닥나기 직전이었다.

미국이 스팅어 지대공 미사일, 재블린 대전차 미사일을 지원했지만 우크라이나가 쉽게 무너질 것으로 가정하고 지하저항운동을 하는데 쓰도록 한 것이었다. 이후 미국과 동맹국들이 포탄과 대포를 서둘러 지원했다.

3월11일 러시아군이 모슈춘을 포위공격해왔다. 코발렌코 대위는 ”그날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느낌이 8번은 들었다“고 했다. ”부대원 다수가 뇌진탕을 당했고 파편상을 당한 사람도 많았다. 공습, 대포, 다연장로켓 모두가 우리 참호를 사방에서 두들겨댔다“고 했다.

우크라이나군이 탱크와 경험많은 군인들을 투입해 전멸하는 것을 막았다. 코발렌코 대위는 뇌진탕 때문에 병원으로 후송됐다. 도중에 도로에서 쌍둥이 형제를 만나 부둥켜 안았다고 했다. 서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당시 러시아군은 이프린과 키이우 서쪽 다른 지역에서 우크라이나군과 국토방위대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이 곳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자 모슈춘을 통과해 키이우로 진격하려고 시도했다.

수도방위를 책임진 시르스키 장군이 드론과 열화상 동영상으로 이프린 강 건너편에 러시아군 장비가 전투대형으로 포진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슈춘이 함락되기 직전이었다.

시르스키 장군은 ”정말 위급한 상황이었다. 모슈춘이 무너지면 곧장 키이우로 진입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프린의 지형이 해결책이 됐다. 모슈춘 상류 25㎞ 떨어진 곳에 댐이 있었다. 전쟁 초기 우크라이나군이 포격으로 댐을 일부 파괴해 저수지 물이 이프린 강으로 흘러들게 했다. 러시아군이 급류로 인해 건너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군정보국 특수부대가 적진 후방으로 침투해 댐을 마저 폭파했다.

시르스키 장군은 ”러시아군이 물에 잠겼고 러시아 해병이 헤엄치기 위해 개인장비를 모두 벗어던진 것을 뒤에 알 수 있었다“고 했다.

3월 셋째주에 러시아 공수부대가 모슈춘에 낙하했다. 우도비첸코 연대장이 잘루즈니 총사령관에 우크라이나군이 더이상 버틸 수 없다며 퇴각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잘루즈니 사령관이 ”방법을 찾겠다“고 했다.

우도비첸코 연대장이 전술을 바꿨다. 3일 간격으로 대대를 교체했다. ”폭격이 심하고 날씨가 추워서 더 이상 견디는 것은 무리였다“고 했다. 그의 부대가 모슈춘을 차단하고 러시아군이 진격하거나 집결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러시아군이 무너지면서 우크라이나군이 반격에 나섰다.

우크라이나 공군 사령관 아나톨리 크리보노즈코 소장은 2월24일 코로나에 걸려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공군기지가 미사일 공격을 당하자 곧장 정맥주사를 뽑아 던지고 택시를 불렀다. 기지로 가야했다. ”일이 벌어지니까 코로나 바이러스가 즉시 없어졌다“고 했다.

격리돼 있는 동안 크리보노즈코 소장은 원격으로 러시아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전투기와 대공망을 재배치했다. 그 결과 러시아군의 첫 미사일 공격이 대부분 허탕을 쳤다. 공격이 시작되기전 전투기들이 이륙해 편대가 유지될 수 있었다.

레즈니코프 국방장관은 ”모조 표적을 만들었다“고 했다.

크리보노즈코 사령관이 공격이 시작되자마다 부대원들에게 90분 이내에 집결하도록 명령했다. 러시아 미사일에 피격된 곳도 있었다. 138 무선기술연대 기지가 공격당하고 공습 사이렌이 울리지 않았지만 안에서 잠자던 50명은 기적적으로 무사했다.

젊은 조종사들이 총류탄을 들고 바실키우 공군기지 방어에 나섰다. 키이우 남쪽 1시간 거리에 있는 유일한 활주로였다. 경험많은 나이든 조종사들은 마지막일 수도 있는 비행에 나섰다.

우크라이나 조종사들은 위험한 임무일수록 나이든 조종사가 나서는 규칙이 있었다. 나이든 조종사들은 ”자식들을 다 키웠다“면서 앞장서 임무를 맡았다.

크리보노즈코 사령관이 하루 서너차례씩 출격해 러시아 공군과 교전한 조종사들도 있다고 했다. 사전 점검도 받지 않고 공격당해 짧아진 활주로를 달려 이륙했고 밤에 정비를 했다. 우크라이나 공군이 반격에 나서자 러시아가 크게 놀라서 전술을 바꿨다고 했다. 처음보다 전투기 출격횟수를 줄이고 미사일 공격을 늘렸다는 것이다.

대공미사일 부대 훈련대장이 데니스 스마즈니 중령은 ”러시아군은 물론 모두가 우리가 몇시간은 아니더라도 며칠 못견딜 것으로 봤다“고 했다.

지상에서 대공미사일 부대가 미사일을 발사한 뒤 즉시 이동해 반격당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러시아군은 지속적으로 전파방해를 해왔다. 138 무선기술연대 지휘관 유리 페레펠리챠 대령은 자기 부대가 포격당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해 전선 후방 10여㎞까지 전진해 활동했다고 했다. ”전투 교범을 어긴 것이었다.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면서 표적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고 했다.

러시아군은 방공망 공격을 최우선시했고 페레펠리챠 대령은 사보타지 공격을 계속 경계했다. 우크라이나 보안국(SBU)에 따르면 내통자들이 공습 표적으로 야광페인트 표시를 한다고 했다. 또 암호 문자를 보내 표적을 알린다고도 했다. 빨간 색 꽃이 있는 문자는 민간 인프라스트럭처가 있다는 표식이며 녹색 꽃은 군사 시설이 있다는 표식이었다. 이들 문자가 ”할머니로부터“라고 돼 있다고 했다.

페레펠리챠 대령은 ”러시아군에게는 이곳에 방공부대가 없을 것으로 알았다. 아무런 저항없이 날아왔고 우리가 그들을 파괴했다“고 했다.

키이우 서쪽에서 러시아군 진격에 대비하던 우크라이나군 제1탱크 연대장 레오니드 호다 대령은 키이우 북동쪽 혼차리우스케로 이동했다. 2월24일 그의 기지에 러시아군 미사일이 날아 들자 호다 대령이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다. 탄약과 연료, 식량을 위장 지역으로 옮기고 부대를 야전으로 분산 배치했다. 참모들과 유사시 부대에서 빠져나가 지하저항에 나서는 방법을 논의했다. 부인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할 생각이었다. 전쟁이 터진 지 몇 시간 만에 최악의 국면이 벌어지는 것같았다.

3만명에 달하는 러시아군 병력이 세방면에서 국경을 넘어 우크라이나 북부 하르키우로 진격해왔다. 인구 28만의 이 도시를 일거에 점령한 뒤 남하해 3일만에 드녜프로강을 건너 키이우로 진격하려는 계획이었다. 호스토멜 공항에 포진한 부대와 함께 키이우 서쪽으로 진격해 포위하려는 것이었다.

러시아군과 키이우 사이에서 맞서는 호다대령 연대 병력은 2000명이었다. ”탱크 10대를 앞세우고 뒤이어 장갑차 30대가 이어지고 12대의 탱크가 다시 이어지는 상황은 무시무시했다. 그들이 그렇게 밀려왔다“고 했다.

호다대령이 즉시 기지에서 나와 체르니히우로 달렸다. 그곳에 전진 지휘소를 설치하기 위해서였다. 체르니히우 북쪽 고속도로에서 대기하던 그의 중대가 러시아군 전위부대에 근접 기습 포격을 가했다. 너무 가까운 거리여서 러시아군은 반격할 생각도 못했다. 두번째 부대도 마찬가지로 붕괴했다. 이 공격으로 러시아군 진격이 막히면서 우크라이나가 방어벽을 강화하고 군대를 소집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후 몇 주 동안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 공방전을 벌여 러시아군이 키이우를 향해 전격전을 전개하지 못하도록 큰 역할을 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을 좁은 지역으로 몰았다. 흙길, 질척이는 들판, 습지로 몰아 기동을 어렵게 만들고 연료소모를 늘렸다. 포장도로 위의 탱크는 기동성 좋은 부대가 공격했다. 다리와 교차로마다 지뢰를 심어 차단했다.

우크라이나 북부 총사령관 빅토르 니콜륙 소장은 ”러시아군을 특정 길로 몰아 넣고 폭파시켜 제거했다“고 했다. 이 전술이 미 국방부의 찬탄을 자아냈다. 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이 ”30개 대대전투단이 몰려오는데 우크라이나군 1개 연대가 이들을 저지했다. 지휘관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전진을 막았다“고 했다. ”러시아군이 진격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급장교들에겐 그럴 권한이 없었다. 우크라이나군은 전기톱처럼 러시아군을 토막냈다“고 했다.

니콜륙 대령은 ”러시아군이 지휘관들에게 재량권을 주지 않은 소련 시대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는 방식이다. 두세사람 죽이면 다른 놈들이 나타나서 진격해온다. 지휘관이 부하 목숨을 가벼이 여기던 1941년대 방식“이라고 했다. 또 ”적들은 자신감이 지나친 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우크라이나가 약해서 그냥 깔아뭉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탱크를 앞세우고 나가면 모든게 끝날 것으로 생각했디“고 했다.

2014년 이래 동부에서 전투를 벌여온 우크라이나군의 경우 의사결정권을 지휘체계 말단으로 이양해 하급 장교가 사령부와 상의없이 현장에서 판단해 대응하도록 하는 서방 방식을 배웠다. 키이우 서부에서 러시아군이 대대적으로 전파방해를 해 호다 대령 등 지휘들이 현장 최전선 군인들과 통신을 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이들 하급 장교들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사령관들은 이들 부대 근처로 이동해 통신을 하고 명령을 전해야 했다.

호다대령은 ”군통신이 완전히 마비됐었다“며 현지 주민들에게 통신을 의존했었다고 했다. ”제보자들에 의존했다. 그들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순 없지만 95%는 정확했다“고 했다.

체르니히우를 내려다 보는 북쪽의 언덕은 체르니히우 수비에 핵심적이었다. 호다 대령은 이곳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우크라이나군은 며칠 동안 계속된 러시아군의 탱크, 다연장로켓 포격을 견디며 맞섰다. 결국 FAB-500 고폭약으로 고지의 상당 부분을 날려버렸다고 니콜륙 소장이 밝혔다.

전사자의 상당수가 자원병으로 구성된 국방경비대원들이다. 대부분 전투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위험한 임무를 맡아서 큰 역할을 했다.

6개월 동안 우크라이나는 전사자 9000명, 실종자 7000명의 피해를 입었다. 실제 피해는 더 많을 것이다. 러시아군은 15000명 이상이 전사했다.

호다대령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키이우에 남기로 한 결정이 군대의 사기를 높였다고 했다. ”전쟁이 터졌는데 대통령은 도망가서 어딨는 지 모른다고 들어봐라. 정말 사기가 떨어지는 일“이라고 했다.

러시아 공군이 초기에 체르니히우 상공에서 제공권을 행사했지만 호다대령 부대는 3월 중순이 돼서야 미국과 유럽국들이 지원한 미스트랄 및 스팅어 휴대용 지대공미사일을 받았다. 이때부터 러시아 전투기들을 격추할 수 있었다고 했다.

막강한 화력과 병력으로 러시아군이 당시 체르니히우 남부를 휩쓸고 체르니히우를 거의 포위했었다. 우크라이나군 58 기동 보병연대가 체르니히우 아래 지역에 추가 투입돼 제1 탱크연대와 함께 싸웠다.

루카시우카 마을 전투가 가장 치열했다. 러시아군이 대대전투단 병력 750명 전원을 투입하고 옛 정교회 교회 건물 마당에 탄약을 비축했다고 호다대령이 밝혔다. 러시아 장갑차가 마을로 몰려왔다. 약 7대의 탱크와 전투차량 19대, 12-13대의 병력 이송 차량과 트럭들이 있었다.

우크라이나군이 루카시우카에서 이들을 격퇴하지 못하면 체르니히우로 이어지는 마지막 ”생명선“이 차단되는 상황이었다.

대규모 병력과 장비를 투입한 러시아군 작전이 실수였다. 루카시우카 마을과 개천이 가로질러 있는 개활지와 좁은 지대를 우크라이나군이 점령하고 있어 러시아군이 노출됐다.

니콜륙 소장은 ”소규모 부대를 투입해 탱크 1,2대와 장갑차 1대, 일부 병력을 제거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그들의 보급로를 차단했다“고 했다.

포격으로 마지막 타격을 가했고 러시아군 장비 대부분이 불에 탔다.

호다 대령은 당시 러시아군이 패배할 것을 알았다고 했다. 병력과 탱크, 장갑차를 너무 많이 잃어서 체르니히우까지 진격할 병력이 없었다고 했다. 거듭된 반격으로 보급선이 너무 길어졌다고도 했다.

이때쯤 다른 진격로를 통한 러시아군이 키이우 동부까지 도달했었다. 강력했지만 어리섞었다. 3월 중순경 키이우 양쪽에서 고전하던 러시아군이 도박을 감행했다. 탱크부대를 러시아 국경에서 우크라이나 중부를 가로지르는 360㎞를 지나 파견한 것이다. 이들이 키이우 근처까지 왔을 때 우크라이나군이 집중 포격을 가했다. 72기갑연대 소속 1개 대대가 19대를 파괴하고 48대를 물리쳤다고 했다. 드론 영상에 러시아 탱크 20여대가 고속도로 옆 진흙탕에서 돌아서 퇴각하는 모습이 잡혔다. 도청으로 러시아군 연대장을 포함해 병력 손실이 매우 크다는 것을 확인했다.

당시 키이우 동쪽에서 러시아군과 맞서 싸우던 드미트로 코발렌코 중대에 승전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스탈린이 일부러 일으킨 대기근에서 살아 남아 2차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할아버지의 유언을 떠올리면서 싸우고 있었다. 러시아인과 공산당은 절대 믿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들 때문에 우리 가족은 크나큰 고통을 겪었다. 그들을 증오한다“고 했다.

탱크부대가 궤멸된 뒤 러시아군은 재편성하지 못하고 키이우 동부 지역을 크게 공격하지 못했다. 도청으로 들리는 러시아군 통신에 따르면 적군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었다. 한때 의기양양했던 그들이 공포와 실망감에 빠졌다. 키이우는 사수됐고 러시아군의 공포가 커지고 있었다.

러시아가 3월말 우크라이나 동부 공략에 집중하겠다고 발표했고 며칠 뒤 러시아군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코발렌코 대위는 ”그들이 갑자기 떠나가 버렸다“면서 쌍둥이 형제 로만과 축배를 들었다. 로만 코발렌코 대위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절대 항복할 수 없다‘고 격려했다. 이것이 바로 정신력의 힘“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는 키이우를 사수함으로써 주권국가로서 독립을 지켜냈다. 그러나 러시아는 동부와 남부에서 우크라이나 영토를 잘라내려 시도하고 있었다.

4월4일 젤렌스키 대통령이 부차를 방문했다. 458명이 피살된 현장이었다. 모두 총살, 고문, 구타의 흔적이 있었다. 지난 6주 동안 젤렌스키 대통령은 매일 사망자와 부상자 숫자를 보고 받았고 이산가족과 다른 나라로 피난한 사람들의 숫자를 확인했다. 군대를 방문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집무실에서 포격 소리와 공습소리를 들으며 깨어 있었고 생명의 위협을 견뎌냈다.

군인들이 복도마다 포진해 있었고 저격병들이 창가에 배치돼 있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 모든 것들에 익숙해졌지만 부차에 갔을 때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죽음이란 이러거구나 하는 느낌, 정적만이 계속 이어졌다. 살아 남은 건 아무 것도 없었다“고 했다.

거리에 시신들이 방치돼 있었다. 건물들은 불탔고 당국자들이 공포스러운 학살을 당한 사람들의 시신을 보여줬다.

”정말 끔찍했다. 모든 것이 파괴됐다. 무엇때문에? 그리고 다른 모든 곳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이것이 저들이 방식이다.“

부차에 가보기 전까지 그는 더많은 무기를 확보하고 전투 판단을 승인하고 외국 지도자들과 협상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키이우에서 승리하는 과정에서 입은 피해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다고 했다.

”정말 마음이 아픈 순간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고, 저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으며, 되돌릴 수도, 옛날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6월 로만과 드미트로 코발렌코 형제가 우크라이나 동부 탄광지대에 파견됐다. 러시아군이 1차 세계대전 방식으로 압도적인 화력을 쏟아붓고 있었고 서방의 최신 무기는 아직 지원되지 않은 때였다.

1달반 동안 트미트로 중대원 3분의 2가 부상하거나 전사 또는 실종됐다. 살아남은 부대원들도 뇌진탕 증상을 겪고 있다.

트미트로 대위가 로만 중대로 갔다. 그 역시 폭발 진동으로 소리를 잘 듣지 못했다. 며칠 뒤 로만이 병원으로 후송됐고 최근 다시 부대로 복귀했다. 키이우로 휴가를 나와 부모와 10살난 아들을 만난 드미트리는 이달초 다시 동부 전선으로 돌아갔다. 아들도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다.

어떻게 작별인사를 해야할 지 몰라 힘들었다고 했다. ”다 잘 될거야. 곧 돌아올테니 기다려“라고 했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