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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이정은]美 학자금 빚 탕감 논란

입력 | 2022-08-26 03:00:00


미국 베스트셀러 작가인 존 그리셤의 소설 ‘루스터 바’에는 억대 학자금 대출에 시달리는 로스쿨 학생 3명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빚에 짓눌려 있던 이들은 가짜 변호사 행세를 하며 돈을 긁어모을 사기 행각을 시작한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대학생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주목받은 작품이다. 그리셤은 2017년 출간 당시 “학생들이 도저히 갚을 길 없는 대출금 위기가 언젠가는 터질 것”이라고 했다.

▷미국 대학생의 55%는 학자금 대출을 받고, 평균 2만8400달러의 빚을 진 상태에서 졸업한다. 학자금 대출이 있는 미국인은 현재 4300만 명. 대출 총액은 1조7500만 달러(약 2330조 원)에 이른다. 연간 최대 7만 달러가 넘는 미국의 대학 등록금을 대출금 한 푼 없이 납부할 수 있는 청년들은 많지 않다. 이자는 불어나는데 임금이 줄고 물가는 오르니 부담은 커진다. 대출자 5명 중 1명은 50세 이상 장년층이다. 수십 년을 갚아 나가고도 아직 원금을 못 털어낸 사람들이 있다는 의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발표한 대대적인 학자금 대출 탕감 계획을 놓고 찬반 논란이 뜨겁다. 빚의 사슬을 끊어 중산층의 안정적 생활을 돕겠다는 취지라지만, 결국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포퓰리즘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치솟는 물가를 잡겠다고 연달아 금리를 인상하면서 한쪽에서는 돈을 뿌리는 무책임한 정책이라는 것이다. 찬성 쪽에서도 의견은 갈린다. 민주당 강성 의원들은 1인당 최대 2만 달러의 탕감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며 되레 5만 달러까지 증액을 요구하고 있다.

▷학자금 대출 탕감이 불붙인 미국 내 공정성 논란은 특히 거세다. 대학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이들, 각종 대출금을 묵묵하고 성실하게 갚아온 이들과의 형평성을 해친다는 것이다. 고소득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엘리트까지 정부가 세금으로 도와줘야 하느냐는 반발이 나온다. 한국 돈으로 1인당 연간 소득이 약 1억6000만 원, 부부 합산으로는 3억 원인 경우까지 탕감 대상에 들어간다니 이런 비판을 피해 가긴 어려워 보인다.

▷공부 때문에 청춘 시절부터 떠안게 된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의미 있는 시도다. 그러나 빚 탕감은 숫자 계산을 넘어 사회적, 도덕적, 정치적 고려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히는 민감한 선택이다. 역차별과 도덕적 해이 논란, 그것이 불러올 부정적 파급 효과까지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최근 한국에서 청년 채무자의 대출이자 감면을 놓고 논란이 불거진 것도 결국 같은 이유였다. 공정성과 경제성 사이의 미묘한 구도 속에서 국민적 합의를 끌어낼 최적의 해법을 찾아내는 일은 한국에도 미국에도 지난한 과제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