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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이 뭐라고[이기진 교수의 만만한 과학]

입력 | 2022-08-26 03:00:00

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일요일 논문을 쓰기 위해 학교 연구실 책상 주위를 배회했지만 두 줄을 넘길 수 없었다.”

사학과 원로 고 이기백 교수의 수필에 나온 한 문장이다. 논문 쓰는 일이 주업인 내게 이 한 줄의 문장은 지금까지도 위안이 되곤 한다. 논문을 쓰다 보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논문 쓰는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대학원 시절, 여름방학 내내 실험실에서 침낭을 깔고 지낸 적이 있다. 당시는 논문 한 편을 꼭 쓰겠다는 열망뿐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논문을 투고했는데, 그해 겨울 국제 저널에 논문이 게재된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때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기다리던 첫사랑의 편지를 받은 느낌, 끝이 없는 긴 터널을 빠져나온 느낌, 물리학자가 된 느낌.

그때만 해도 내게 더 어려운 길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세상 이치일까? 논문 한 편을 더 쓰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더 독창적이고 더 창의적인 생각과 노력이 필요했다. 쉽지 않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30대 때는 직장을 얻기 위해, 40대 때 교수가 되어서는 승진을 위해, 교수로서 자리를 잡은 후에는 연구비를 따내기 위해 꾸준히 논문을 써야만 했다. 논문은 물리학자에게는 숙명 같은, 혈관 속의 피 같은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1900년 여름방학 때 첫 논문을 썼다. 박사 학위를 받고 난 후 직장을 구하며 절망적인 시간을 보낼 때였다. 논문의 주제는 ‘모세관 효과’에 관한 것이었다. ‘모세관 효과’는 음료수를 먹을 때 빨대를 꽂아 놓으면 음료수가 빨대의 옆면을 타고 올라오는 현상을 말한다. 그의 논문은 다음 해 3월에 물리학 학회지에 게재되었는데, 그리 주목받는 논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개인에게는 의미 있는 최초의 논문이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활하는 반백수 상태였다. 이 와중에 유럽의 교수들에게 구직 편지를 보낼 때 함께 넣을 수 있는 논문 한 편은 아인슈타인에게 마치 구원투수 같지 않았을까. 다행히 1902년 6월, 아인슈타인은 친구 마르셀 그로스만의 도움으로 특허청에 취직했고, 특허 심사관으로 일하며 논문을 썼다.

1905년, 26세가 되던 해 아인슈타인은 기적적으로 3편의 논문을 동시에 발표했다. 상대성 이론과 광전 효과와 기체 분자의 열운동에 관한 논문으로, 이 논문 3편은 물리학의 근간을 바꾸어놓는 혁명적인 논문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3페이지로 간결하게 쓴 논문들이었다. 그리고 이 논문들로 아인슈타인은 곧바로 물리학계에서 권위자가 되었다. 누구나 아인슈타인이 천재라는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논문들이었다. 세상을 바꾼 그의 논문들은 하룻밤 만에 쌓아올린 것이 결코 아니었다. 10년 동안 이 문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마침내 찾아낸 해답을 논문이라는 형식으로 발표한 것들이었다.

일요일 논문을 쓰기 위해 학교에 나와 연구실 책상 주위를 배회하는데, 연구실 옆방 블랙홀을 연구하는 김 박사의 기침 소리가 들린다. 옆방 김 박사의 기침 소리가 위안이 된다. 논문 한 줄을 쓰기 위해 나만 홀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지가 있다는 것에.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