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세기에 활동한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중 한 명인 에우리피데스의 흉상. 조대호 제공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기원전 416년, 패권주의의 민낯이 드러났다. 아테네인들은 에게해의 작은 섬 멜로스로 쳐들어가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팔아넘겼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쟁에서 멜로스인들이 중립을 지킨 것이 살육의 이유였다. 이웃 나라가 적의 편에 설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낳은 만행이었다. 한 해 뒤 에우리피데스는 ‘트로이아의 여인들’을 무대 위에 올렸다. 극장의 관객은 누구나 멜로스의 학살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것은 전쟁에 대한 고발이자 절망하는 인간의 이야기였다.》
트로이아, 황금도시서 잿더미로
작품 속 트로이아는 더 이상 영광의 도시가 아니다. 황금의 도시는 화염 속 잿더미로 변했다. 신전들이 파괴되고 왕궁이 불에 탔다. 보물 창고들도 약탈자들의 손에 넘어갔다. 남녀노소가 어울리던 축제의 도시는 침묵하는 여인들의 도시로 바뀌었다. 남자들은 모두 죽고 여인들이 남았지만 이들의 신세는 모두 똑같았다. 해변의 천막에 수용된 여인들은 제비뽑기를 기다린다. 주인이 정해지면 그들은 그리스인들의 함선에 실려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날 것이다. 나는 누구의 노예, 누구의 노리개가 될까? 어떤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행운의 정점에 있던 자에게 추락의 고통은 더 크기 마련이다. 왕비 헤카베의 처지가 그렇다. 그녀는 오디세우스의 노예로 살아야 한다. 모든 것을 잃은 여인에게 무엇이 남아 있을까. 큰아들 헥토르, 만인의 존경을 받던 도시의 수호자는 아킬레우스의 손에 쓰러졌다. 남편 프리아모스, 다정하고 지혜롭던 왕은 도시의 함락 직후 신전의 계단에서 살해되었다. 믿음직한 아들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없다. 전장에서 살아남은 아들들은 한밤중 목마에서 뛰쳐나온 그리스인들에게 피살당했다. 기억 속 과거의 영화가 홀로 남은 왕비의 속을 후벼 판다.
절망 끝에서 나온 카산드라의 춤
솔로몬 조지프 솔로몬이 1886년 그린 ‘아이아스와 카산드라’. 오일레우스의 아들 아이아스가 트로이아를 함락한 뒤 아테네 신전에서 카산드라를 강제로 끌어내고 있다(왼쪽 사진). 아폴론 신의 예언녀인 카산드라는 아가멤논의 첩으로 끌려간 뒤 비극적 앞날을 내다보고 최후의 춤을 춘다. 기원전 5세기 토기에 그려진 카산드라(오른쪽 사진 왼쪽)와 아이아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위키미디어
아가멤논의 첩으로 끌려간 뒤 어떤 운명이 펼쳐질지 카산드라는 잘 안다. 아가멤논의 바람난 아내는 돌아온 남편을 죽이고 그를 죽인 도끼날로 자신의 머리를 내리칠 것이다. 아가멤논의 화려한 왕궁에서 그녀는 단 하루도 넘길 수 없다. 피할 길 없는 운명 앞에서 카산드라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횃불을 들고 미친 듯 천막에서 뛰쳐나와 그녀는 춤을 춘다. 축하하는 사람 하나 없는 저주 받은 혼인을 위한 자축이다. “발을 높이 들어라!/하늘 높이 윤무를 이끌어라, 야호, 야호,/전에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던/가장 행복했던 시절처럼 … 춤을 추세요. 어머니, 활짝 웃으세요!/나와 함께 이리저리 발을 돌리면서/신나게 몸을 흔드세요!” 카산드라의 춤은 절망을 넘어선 아름다움이다.
과거를 상기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다. 이런 능력 덕분에 인간의 삶은 현재를 넘어선다. 하지만 선택의 자유가 없는 상황에서 그런 능력이 무슨 소용일까? 기억과 계획은 고통을 안겨줄 뿐이니. 기억 속의 즐거운 과거도, 절망의 미래도 현재를 더욱 비참하고 견디기 어렵게 만든다. 차라리 과거도, 미래도 모르는 채 “현재의 말뚝에 매인 동물”(니체)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그래서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의식은 ‘가장 인간적인 고통’의 원천이다. 트로이아 여인들뿐만 아니라 자유를 빼앗긴 채 절망 속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고통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 때 우리도 카산드라의 춤을 추어야 할까?
행복하게 사는 법, 절망 견디는 법
현자들과 철학자들은 행복하게 사는 법뿐만 아니라 절망을 견디는 법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그들이 찾은 대답은 한결같다. ‘현재를 사는 것.’ “현재 속에 사는 자는 두려움도, 희망도 없이 산다.” 전쟁터의 참호에서 철학적 생각들을 길어낸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감옥에서 처형을 기다리며 ‘철학의 위안’을 쓴 보에티우스가 남긴 말도 같다.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Nec speres aliquid nec extimescas).” 그렇다면 ‘현재 속에서’ 두려움도, 희망도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응답하지 않는 신에게 기도하기, 절망의 고통 속에서 지혜를 길어내기, 절망을 글로 쓰고 노래하고 춤추기, 함께 절망하는 이웃과 이야기하기…. 이렇게 따져 보면 절망스러운 현재 속에서 사람들이 하는 일은 행복의 순간에 그들이 하는 일과 다를 게 없지 않나?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 안달복달 돈과 인정을 추구한다. 권력도 인정을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돈과 권력을 좇는 것만큼 불안한 처세법은 없을 것이다. 가장 변덕스러운 것들에 모든 삶을 내거는 일이니까. 진짜 처세법은 현재를 사는 법을 익히는 것, 모든 것을 빼앗긴 순간에도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언제 변할지 모르는 운명에 맞서 항상 카산드라의 춤을 준비해 둬야 하지 않을까?
미래의 복수가 두려워 어린아이까지 살해한 트로이아 정복자들이나 다른 편에 설 것이 두려워 이웃 나라를 침공한 아테네인들이나 실제로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었다. 트로이아를 정복하고 전리품을 탈취한 자들은 승리의 영광을 맛보지 못하고 귀향 중에 몰락했다. 멜로스를 정벌한 아테네인들은 시켈리아 원정에 나섰다가 전멸하고 패망했다. ‘트로이아의 여인들’이 공연되고 몇 달 뒤 일이다.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