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의 자손이 태어날 때 태(胎)를 봉안하는 태실과 관련된 그림들, 고려말 조선 초 불상과 불경이 보물이 됐다.
문화재청은 26일 ‘장조 태봉도’ 등 유례가 드문 조선왕실 태실 관련 그림 3점과 ‘건칠보살좌상’, ‘금동아미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 ‘묘법연화경’ 등 고려 말~조선 초 불상, 조선 초기 불경 등 총 6건에 대해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했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한 태봉도는 ‘장조 태봉도’, ‘순조 태봉도’, ‘헌종 태봉도’ 등 3건이다.
장조 태봉도는 1785년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 후에 장조로 추존)의 태실과 주변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장조의 태실은 1735년 출생 후 경상북도 예천군 명봉사 뒤편에 마련됐다. 1785년 사도세자로 추존됨에 따라 난간석과 비석 등 석물이 추가로 배치됐다.
그림 속 장조 태실은 많은 산봉우리가 에워싼 타원형 구도 속에 있다. 멀리 상단에는 뾰족한 원각봉을, 가운데에 명봉사와 문종태실 배치했다. 그 위로 사도세자 태실인 ‘경모궁 태실’을 그렸다.
장조의 태실은 이중으로 된 연꽃지붕이 있는 개첨석에 팔각 난간석을 둘렀다. 앞쪽에는 거북형 받침에 표석이 있다.
좌우 사방으로 펼친 듯한 구도에, 주요 장소에 지명을 써 놓은 방식, 줄지어 있는 삼각형 모양의 산들, 짙은 먹으로 거칠게 표현한 봉우리 등 지도식 표현이 두드러진 것이 특징이다.
순조 태봉도는 순조가 1790년 태어난 후,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에 태실을 만들어 태를 안치한 태실의 형상과 그 주변 지형을 그린 그림이다.
순조가 1800년 즉위한 후 1806년 태실 난간석 등 석물이 추가됐다.
S자 형태 경계에서 오른편 위에 둥근 봉우리를 배치하고 그 위에 태실을 그렸다. 왼편 아래에 여러 전각이 어우러진 속리산 법주사가 보인다.
둥근 봉우리 주위 배경에 아무 것도 그려 넣지 않아 태실이 돋보이도록 했다.
태실은 형태의 상세 묘사가 특징이다. 연꽃지붕이 있는 지붕돌을 얹었고 팔각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앞쪽에는 거북모양 받침에 표석을 세웠다.
붉은 선으로 도로를 표시해 정확한 지리정보를 담고자 한 점, 점과 획을 반복해 무성한 나뭇잎을 표현한 점 등 전체적으로 지도와 산수화 성격이 혼합됐다.
헌종 태봉도는 헌종이 1827년 태어난 후,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에 마련된 태실과 주변 경관을 그린 작품이다.
헌종이 1834년 즉위한 후 1847년 그림 속 태실처럼 격식을 갖춘 것으로 보아 이 태봉도는 왕 즉위 후 태실 주변 석물을 새로 조성하는 태실가봉을 할 당시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태실 아래편에는 무성한 나무숲을 채워 넣었고 그 위 주위 배경은 여백으로 비워 태실이 돋보이도록 했다.
태실은 연꽃지붕이 있는 지붕돌과 팔각 난간석, 앞쪽에 놓인 거북모양 받침에 표석이 세워진 모습이다.
이 그림은 다른 두 건의 태봉도와 달리 전경, 중경, 원경의 구성을 적용한 전형적 산수화 구도를 보여준다.
전경에는 지붕이 보이는 마을이, 중경에는 수풀에 둘러싸인 태실이 배치됐다. 원경에는 봉우리와 멀리 보이는 먼 산을 간략하게 그렸다.
능숙한 필치로 산봉우리를 현실감 있게 표현했고 부드러운 먹색으로 입체감을 나타냈다. 중간 중간 안개 낀 모습을 효과적으로 구사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태봉도 3건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지던 장태 문화를 조선왕실에서 의례화시켜 새로 태어난 왕자녀의 태를 좋은 집터나 자리를 일컫는 길지에 묻는 독특한 안태의례를 정착시킨 전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태봉도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역사성ㆍ희소성이 있다. 제작 동기와 제작 시기가 분명하고 태실과 관련된 왕실 회화로서 역사적, 미술사적 가치가 높아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
고려 말?조선 초 제작된 건칠보살좌상은 머리에 보석으로 꾸민 화려한 관을 쓰고 두 손은 설법인을 결한 좌상이다.
제작기법은 흙으로 빚은 형상을 만든 뒤 그 위에 천을 여러 겹 발라 옻칠한 다음 소조상을 제거한 건칠 기법이 사용됐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칠불상은 신라 말~고려 초 제작으로 추정되는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으로, 그 다음으로 10세기 초 제작으로 추정되는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으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건칠불 사례는 20여점에 지나지 않으므로 불교조각사에서 희소한 가치를 지닌다.
건칠보살좌상은 124.5㎝의 큰 규모에 근엄하면서도 정교한 장식성이 돋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안정된 비례감과 중후한 신체 표현, 사람 손처럼 양감을 강조한 두 손, 자연스럽게 땋아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석영재질의 눈동자를 별도로 만들어 넣는 등 사실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러한 정교함은 얼굴에서 풍기는 근엄함과 넓은 어깨에서 느껴지는 장대함이 서로 대조되면서 당당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후대의 보수 흔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제작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고, 현존하는 건칠보살상 중 가장 규모가 크며 중량감 넘치는 조형미를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에 유행한 건칠기법과 공예기술이 모두 반영된 점에서 보물로 지정될 만한 가치가 높다.
금동아미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은 복장발원문을 통해 1333년에 조성된 사실이 밝혀진 불상이다. 본존 아미타여래상과 좌우 협시인 관음보살, 대세지보살로 구성됐다.
고려 14세기 삼존상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췄으며 제작연대 기준이 되는 양식을 지닌 점에서 한국불교조각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발원문을 통해 이 삼존상은 시주자인 장현과 그의 처 선씨, 김진, 이겸 등이 발원자로서 제작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삼존불을 시주한 김진과 이겸은 고위관직을 지낸 인물들로서 원나라 태황태후를 하례하거나 중요 불사에 참여한 행적이 있다는 점에서 이 불상의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
불상과 보살상에서 보이는 귀공자풍의 이목구비와 단아한 형태, 동그란 형태의 중간계주, 높은 보계와 보계를 묶어 올린 방식, 유려하게 살아 있는 신체의 굴곡, 단정하게 묶은 내의의 띠 자락, 이중으로 겹쳐 만든 화형 보관 등 14세기 유행 불상 양식을 잘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섬세하고 뛰어난 조각과 주조기술, 금속공예 기법을 두루 살필 수 있어 중요하다.
금동아미타여래삼존상은 본존 아미타여래와 좌우 협시인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상이 제작당시의 모습 그대로 모두 남아 전하는 사례로서 가장 큰 가치를 지닌다.
불상이 지닌 양식과 조형성, 발원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고려 후기 불상 제작 이해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므로 보물로 지정해 보호할 가치가 충분하다.
묘법연화경은 1405년 음력 3월 하순 안심사에서 조성한 불교경판을 후대에 인쇄해 펴낸 경전으로서, 7권 2책으로 구성된 완질본이다.
동일 경판에서 인쇄해 펴낸 판본 중 이미 보물로 지정된 자료와 비교할 때 시주자와 간행정보가 모두 확인된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 특히 이 중 권1~3은 매우 희소한 권차라는 점에서 자료적 완전성이 높다.
청도 도연사 소장 묘법연화경은 조선 초기 불경 출판인쇄 경향과 각수의 변상도 제작 수준, 고려 말?조선 초 불교사상의 경향을 추적할 수 있는 원천정보가 된다는 점에서 역사·문화적인 가치가 있다.
전반적으로 보존 상태가 온전하며, 완질본이라는 점에서 보물로 지정해 보존할 필요가 있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