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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맘 골퍼의 길, 그래도 행복은 몇 배↑

입력 | 2022-08-27 17:48:00

[김종석의 인사이드 그린] 안선주 유일한 KLPGA 엄마 선수… LPGA, 경기장 탁아소 운영




안선주와 쌍둥이 자녀(왼쪽). 미국 스테이시 루이스와 딸. 안선주 페이스북, LPGA 홈페이지

안선주(35)에게 휴대전화로 전화했더니 문자메시지로 되돌아왔다.

“아기가 자고 있어서 받기가 힘들어요. 시간 될 때 전화 드려도 될까요.”

안선주는 2022시즌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투어에서 뛰는 유일한 엄마 선수다. 대회마다 보통 144명가량이 출전하는데 그중 기혼자는 있어도 ‘맘 골퍼’는 그 혼자다. 지난해 6월 아들 딸 쌍둥이를 출산한 안선주는 올해 필드에 복귀했다.

한국과 일본 무대를 연이어 평정했던 안선주는 8월 21일 강원 정선군 하이원리조트CC(파72)에서 열린 KLPGA투어 하이원리조트 여자오픈에서 우승 경쟁에 뛰어드는 저력을 발휘했다. 3라운드에서 5언더파 67타를 쳐 단독 선두에 선 그는 마지막 날 5오버파 77타로 흔들리며 최종 합계 5언더파 283타를 기록해 자신의 시즌 최고 성적인 공동 8위로 마쳤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전날보다 10타를 더 친 아쉬움이 커보였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높은 산을 간절하게 넘어보고 싶었다. 오늘만 소리 내어 울고 다시 내일부턴 원래 안선주로 돌아가자. 솔직히 괜찮으냐고 물어본다면 괜찮지는 않다”는 내용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당시 상황을 묻자 안선주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하다 보니 오히려 부담이 컸다. (임신과 출산에 따른) 공백기를 무시할 수 없는 것 같다. 그 옛날 루키 때로 돌아간 듯 긴장했다”고 털어놓았다. 안선주가 우승자가 나올 가능성이 높은 마지막 날 마지막 그룹을 뜻하는 챔피언 조에 들어간 것은 일본에서 뛰던 2019년 이후 3년 만이었다. 한국과 일본을 합쳐 35승을 올린 베테랑인 그였지만 모처럼 우승 트로피가 눈앞에 아른거리자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할 수 없었다.

안선주, 지난해 6월 아들 딸 쌍둥이 출산

8월 21일 강원 정선군 하이원리조트에서 열린 KLPGA투어 하이원리조트 여자오픈에서 샷을 하는 안선주. 박태성 작가 제공

19세 때인 2006년 KLPGA투어에 데뷔한 안선주는 2009년까지 매년 우승을 신고하며 4년 동안 7승을 올렸다. 2007년에는 국내 최고 대회인 한국여자오픈을 포함해 3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최고 실력자로 눈부신 성적을 거뒀지만 조 편성이나 프로암대회에서 차별을 받는 등 외모지상주의에 휘말려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

2010년 일본투어에 진출한 뒤 28승을 거두며 4차례나 상금왕에 등극했다. 일본에서만 통산 상금 10억 엔을 돌파했다. 한국여자골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그는 빛나는 공로를 인정받아 KLPGA투어 영구시드를 받았다. 본인만 원한다면 평생 국내 투어 대회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이다.

안선주가 ‘높은 산’이라고 표현한 대로 프로골퍼의 일과 엄마의 일을 같이 꾸려가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출산 후 몸이 변해 예전 같은 스윙이 잘 안 됐어요. 엄마로도, 선수로도 최고가 되고 싶긴 한데 둘 다 놓치는 건 아닌가 하는 스트레스도 커지더라고요.”

엄마가 된 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쌍둥이와 떨어지기 힘들어 이번 시즌에는 일본 대신 국내 복귀를 선택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훈련을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올해 들어 16개 대회에 출전해 14차례 컷을 통과하는 안정된 페이스를 유지하며 시즌 상금 1억 원을 돌파했다. 이 정도 성적도 대단하다는 게 KLPGA투어 안팎의 평가다.

“육아가 너무 힘들어서 연습할 시간과 체력이 남아나지 않아요. 집에 있으면 애 돌보느라 쉴 수가 없어요. 대회 출전이 연습이죠.”

안선주가 스윙 코치 겸 캐디인 남편 김성호 씨와 투어를 뛰는 동안 두 아이는 친정어머니가 돌봐준다. “친정엄마에게 늘 미안하다. 가끔 휴가도 보내드려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그래서 더 잘 치고 싶은 생각이 절실하다”는 게 그의 말이다.

명절만큼은 집을 비울 수 없어 이번 추석 때는 대회에 나가지 않을 계획이다. 안선주는 “예전에 선배 프로들로부터 아이와 떨어지는 시간이 너무 힘들어 결혼하면서 운동을 관둬야 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나 역시 그런 부분이 힘들다”며 “아이들이 크면서 시시각각 변하는데 제때 못 보는 부분도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국과 달리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 투어에서는 ‘워킹 맘’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LPGA투어 자료에 따르면 이번 시즌 출전 자격이 있는 엄마 선수는 25명에 이른다. LPGA투어 통산 13승을 올린 스테이시 루이스(37·미국)는 2018년 10월 딸을 낳고 3개월 만에 복귀했다. 통산 8승을 올린 브리트니 린시컴(37·미국)은 2019년 첫딸을 얻은 데 이어 올가을 둘째 출산을 앞두고 임신 상태로 플레이하고 있다.

캐트리오나 매슈(53·영국)는 2009년 둘째 딸 출산 후 11주 만에 불혹의 나이로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우승해 ‘슈퍼 맘’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미셸 위(33·미국), 줄리 잉크스터(62·미국) 등도 대표적인 엄마 골퍼. 두 딸을 둔 잉크스터는 개인 통산 메이저 대회 7승 가운데 4승을 출산 후 거뒀다.

과거 한국 선수 가운데 한희원은 프로야구 선수 출신 손혁과 사이에 아들을 낳은 뒤 LPGA에서 뛰는 한국 엄마 골퍼 1호가 됐다. LPGA투어를 거친 한국 엄마 골퍼로는 한희원을 비롯해 김미현, 장정, 서희경 등이 있었다. 허미정은 올해 출산 후 휴가에 들어갔다.

LPGA투어는 엄마 골퍼들이 육아와 운동을 병행할 수 있도록 탁아 시설과 보모 서비스 등을 제공하며 돕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LPGA투어는 1993년부터 대회 기간에 무료 탁아소를 운영 중이다. 탁아소는 대회 때마다 늘 비슷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같은 장난감이나 유아용품을 비치하는 등 세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린시컴, 출산·육아로 쉬어도 스폰서 기업 후원받아

9월 출산 예정인 박주영. 박태성 작가 제공

루이스는 딸이 첫돌도 지나기 전부터 투어에 동행했다. 루이스는 평소보다 이른 티오프 3시간 전에 일어나 활동을 시작했다. 8개월 된 아기를 위해 준비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20대 때 선수 생활을 하다 출산 후 은퇴하지 않고 아이와 함께 계속 경력을 쌓는 건 멋진 일이다. 물론 쉽지는 않지만 딸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루이스는 또 “주위에 엄마 골퍼들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 동병상련의 처지가 되고 같이 놀 아이들이 있는 것도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고 전했다. 루이스는 2020년 LPGA투어 ASI 레이디스 스코티시 오픈에서 우승했다. “엄마가 된 뒤 모든 게 새롭게 다가왔다. 하루하루가 도전의 연속이었지만 딸을 위해 골프를 더 열심히 하려고 했다.” 시상식에서 그가 밝힌 소감이다.

린시컴은 스폰서 기업인 CME와 다이아몬드 리조트 측이 출산·육아로 쉬어도 후원금을 그대로 지급하겠다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운동과 육아를 병행하기 힘든 한국 선수에게는 그저 부러운 현실이다. 예전에 엄마 골퍼 안시현과 홍진주는 자녀가 보는 앞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하지만 국내에선 결혼, 출산, 육아로 경력이 단절되는 경우가 많아 엄마 선수의 존재감은 희미하다. 안선주는 “미국은 그래도 대회 장소 안에 아이들을 돌봐주는 서비스가 있어 환경이 그나마 낫다. 한국도 엄마 골퍼가 많아지면 그런 서비스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 후배들에게 애 좀 낳으라고 꼬신다”며 웃었다. 요즘 대회에 나가면 안선주가 결혼했거나 결혼을 앞둔 후배 선수들로부터 자주 듣는 고민도 바로 출산 관련 문제다.

“애는 낳고 싶은데 무섭다고 하네요. 그럼 솔직하게 말해줍니다. 힘들겠지만 아이를 낳으면 행복은 몇 배가 될 거라고요.”

KLPGA투어에서 간판선수로 활동하던 박주영은 지난해 말 결혼 후 올해 5월까지 임신 상태로 대회에 나섰고 지금은 출산 휴가에 들어갔다. 9월 중순 출산 예정인 그는 내년 필드에 복귀할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박주영은 LPGA투어에서 뛰는 언니 박희영과 자매 골퍼로도 유명하다. 박희영 역시 임신해 휴가에 들어갔다.

어느덧 30대 중반을 넘긴 안선주는 내년 시즌을 은퇴 전 마지막으로 꼽고 있다. 당초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려던 계획은 흔들리고 있다. 쌍둥이가 눈에 밟혀서다.

“아이들을 두고 일본 가서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요. 어디서 뛰든 나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우승 기회도 다시 오지 않을까요.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김종석 부장은…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동아일보 스포츠부장을 역임한 골프 전문기자다. 1998년부터 골프를 담당했고 농구, 야구, 테니스, 배드민턴 등 주요 종목을 두루 취재했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354호에 실렸습니다》




김종석 채널A 성장동력센터 부장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