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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칼럼]‘작은 정부’ 앞세운 윤석열, 레이건의 ‘위대한 설득’부터 배워야

입력 | 2022-08-29 03:00:00

레이건, 여소야대 뚫으려 수시로 野 의원 만나 토론·설득
반대 많던 ‘레이거노믹스’ 입법 성공… 尹 경제·민생 살리려면 야당 만나야



천광암 논설실장


“좋지 않은 성적표와 국제 경제위기 상황에서 우리 정권이 출범했지만 국제 상황에 대한 핑계, 전 정권에서 물려받았다는 핑계가 이제 더 이상은 국민에게 통하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25일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한 말이다. 인사 실패 등 뼈아픈 지적이 나올 때마다 “전 정부와 비교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방어막을 치곤 했던 윤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유한(有限)책임이 아닌 ‘무한(無限)책임의 리더’라는 뒤늦은 자각에서 나온 말이라면, 의미 있는 변화다. 만시지탄일 따름이다.

윤 대통령의 경제정책은 많은 부분에서 1981∼89년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로널드 레이건을 벤치마킹했다. 윤석열 정부가 내건 규제 완화, 세금 감면, 작은 정부가 모두 레이거노믹스의 뼈대에 해당하는 것이다. 윤 대통령의 연찬회 발언에는 한편으로 ‘전 정권에서 좋지 않은 성적표를 물려받았다’는 데 대한 억울함도 상당 부분 배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레이건과 비교하면 그럴 일도 아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백악관에 입성할 당시 물가상승률은 두 자릿수까지 치솟은 상태였고, 연준 금리는 20%를 넘었다. 인플레이션 퇴치를 위해 연준이 급속히 금리를 올린 결과 사상 초유의 스태그플레이션의 먹구름도 몰려오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레이건은 재임 기간 중 성장·물가·고용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물가는 12%대에서 5%대로, 실업률은 7%대에서 5%대로 떨어졌고, 일자리 1700만 개가 새로 창출됐다.

윤 대통령이 주목해야 할 점은 레이거노믹스가 여소야대라는 불리한 정치 지형에도 불구하고 의회 입법을 통해 실현됐다는 점이다. 레이건이 집권했을 당시 상원은 여당인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하원은 민주당이 243석으로 192석인 공화당을 압도했다. ‘큰 정부’와 ‘넓은 복지’를 정책 골간으로 삼는 민주당이 레이거노믹스에 격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리란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레이건이 한 선택은 야당 지도부를 포함한 개별 의원들에 대한 지속적인 접촉과 설득, 협상이었다. 취임 이튿날 영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 정상과 통화를 한 레이건이, 3일째에 한 것이 민주당 의원 4명과 만나 규제 완화에 대해 논의한 일이다.

취임 70일째에 존 힝클리의 흉탄이 레이건의 폐를 뚫었지만 그의 야당 설득 행보는 멈춤이 없었다. 70세의 고령이던 그가 수술을 받고 백악관에 다시 출근한 4월 24일부터 레이거노믹스가 구현된 정책을 담은 법안이 통과되는 7월 29일까지 백악관 기록에 나타난 그의 행적을 보자.

5월 4일 4그룹의 민주당 의원 28명과 토론. 5월 6일 다른 그룹의 민주당 의원들과 토론. 5월 11일 공화·민주 양당 하원의원들을 백악관으로 초청. 5월 14일 양당 상원의원 초청 리셉션. 6월 4일 보수적 성향의 민주당 의원들과 미팅. 7월 17일 민주당 의원들과 만나 법안에 대해 상의. 7월 26일 민주당 의원 15명을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해 바비큐 파티. 7월 27일 법안 통과를 호소하는 대국민 연설을 한 후 양당 의원들과 개별 접촉. 7월 28일 양당 의원 43명과 만나 법안 통과를 설득.

하루에 몇 시간씩 전화통을 붙잡고 야당 의원을 설득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법안은 238 대 195로 하원을 통과했다. 찬성표 중 48표가 민주당에서 나온 것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달 법인세와 부동산세 부담을 낮추는 내용의 세제개편안을 내놨다. 또 이달 26일에는 규제혁신전략회의를 열고 경제형벌 완화 청사진을 밝혔다. 하지만 감세든 규제 완화든 거대 야당이 지배하는 국회의 벽을 넘지 못하면 공허한 ‘입 잔치’에 불과할 뿐이다.

야당이 현 정부의 발목을 잡아 경제 살리기가 지연될 경우, 야당은 야당대로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야당의 발목 잡기’가 윤 대통령의 실패에 대한 면책 사유가 될 수는 없다. 야당을 설득해서 정책을 성공시키는 것까지가 윤 대통령이 짊어진 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쌍방이 모두 지는 게임이다.

문제는 야당을 어떻게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고 설득할 것이냐다. 여론을 등에 업고 야당을 압박하는 전략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지지율 20%대 정부에는 공상일 뿐이다. 윤 대통령이 ‘경제대통령’으로 성공하기 위해 당장 시급히 배워야 할 것은 경제이론보다 ‘위대한 설득자(The Great Persuader)’, ‘위대한 소통자(The Great Communicator)’로서 레이건의 면모일 것이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