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장은수 출판평론가
유령처럼, ‘문해력’이 다시 돌아왔다. 2019년 ‘명징’과 ‘직조’, 2020년 ‘사흘’, 2021년 ‘금일’과 ‘무운’에 이어 이번엔 ‘심심한 사과’가 논란의 무대에 올랐다. 이달 20일 서울의 한 카페가 트위터에 올린 공지문이 사회적 쟁론의 계기를 제공했다. “예약 과정 중 불편 끼쳐드린 점 다시 한번 심심한 사과 말씀 드립니다.”
무난하고 흔해 빠진 사과문이었다. 그러나 글을 읽은 사람들이 “심심한 사과? 난 하나도 안 심심해” “제대로 된 사과도 아니고 무슨 심심한 사과?” 등의 댓글을 달면서 이슈가 불거졌다. ‘심심하다’는 심심한 맛, 심심한 행사, 심심한 사과, 심심산천 등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심심(甚深)한 사과’일 때는 ‘마음이 깊고 간절하다’란 뜻이나 ‘심심한 행사’일 때는 ‘지루하고 재미없다’란 뜻이다. 어휘력이 달려 오해한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댓글을 퍼 나르고 의견을 덧대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문해력’에 초점을 놓았다. 이에 따라 논의가 청년 세대 전체의 문해력을 비아냥대고 비난하는 ‘세대 전쟁’으로 발전했다. 한자에 익숙지 않은 청년들을 조롱하고 개탄하는 ‘요즘 것들 이야기’로 흘러간 것이다. 그러나 그간의 몇 차례 반복된 논란에서 보듯, 이런 식의 이야기는 별로 생산적이지 못하다. 무엇보다,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2년 세계 주요 국가를 대상으로 한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에 따르면, 16세 이상 65세 이하 한국의 성인 문해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평균 정도에 해당한다. 그러나 청년만 놓고 보면, 전혀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한국의 16∼24세 청년의 문해력은 일본, 핀란드, 네덜란드와 함께 최상위권에 속했다. 실제 문해력에 문제가 있는 건 장년 세대였다. 45∼54세 문해력은 하위권, 55∼65세 문해력은 최하위권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한자어 어휘력은 전체 문해력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므로, 그 영향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성인 문해력에 주로 영향을 주는 것은 고등교육률과 지속적 자기계발 여부다. 10명 중 7명이 고등교육을 받고 자기 학습에 열정적인 청년 세대의 문해력이 장년 세대보다 낮을 리 없다.
‘요즘 것들’의 문해력엔 사실 큰 문제가 없다. 내가 쓰는 단어 몇 개 못 알아듣는다고 문해력 운운하면서 한자어 공부를 시켜야 한다느니 하고 ‘꼰대’처럼 말하면 곤란하다. 문해력만 따지면, 사회 변화에 따라 새롭게 생겨난 어휘를 모르는 게 더 심각하다. 한자는 모르면 안 쓰면 되지만, 디지털 문명과 관련한 어휘들은 모르면 삶이 불편해지고 미래는 컴컴해진다. ‘디지털 문해력’이 강조되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해서, 쓰는 사람이 읽는 사람을 배려해야지 굳이 한자어를 써서 논란을 불렀다고 타박하는 것 또한 어이없다. 무지를 옹호할 이유는 별로 없다. ‘심심한 사과’ 같은 말은 정부나 공공기관 등에서 흔히 쓰는 관용어구다.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형식적·기계적 사과일 순 있어도, 현학을 자랑하려고 일부러 골라 쓴 말은 아닐 것이다.
말은 조심해 가려 써야 하나, 지나치면 억압을 초래한다. 대화의 맥락에 따른 예의를 크게 잃지 않는 한, 한자어든 신조어든 마음껏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 아무 때나 낯선 단어를 남발하면서 ‘못 알아듣는 네가 잘못’이라는 식의 엘리트적 권위주의와 마찬가지로, ‘내가 모르는 말 쓰지 마’ 또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 하는 네가 틀림’ 같은 태도도 폭력적이다. 성장 과정에 따라 사람마다 축적한 어휘가 다르므로, 나와 다른 말을 쓰는 이들을 인정치 않으면 대화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문제는 문해력이 아니라 낯선 말을 접했을 때의 태도이다. 카페 주인이 고객을 대상으로 사죄하면서 ‘지루한 사과’ 같은 말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분을 못 이기고 즉각 ‘지적질’에 나서는 경솔함 대신, 한 걸음 물러서서 ‘심심한’에 혹여 내가 모르는 의미가 있을 수 있음을 숙고하는 신중함을 보였으면 좋았을 테다. 사랑이 가능하고 우정이 이어지는 것은 낯선 말들을 알아들으려고 애쓰면서 대화를 이어가려는 자세 덕분이다. 적대와 의심, 조롱과 풍자로 맞서는 대신 서로 선의를 품고 다정함과 친밀함을 늘려가는 행위 없이 공동체는 유지되지 않는다.
장은수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