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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만에 잡은 살인강도[횡설수설/정원수]

입력 | 2022-08-30 03:00:00


2001년 12월 대낮에 대전의 은행 지하주차장에서 현금 수송차가 습격당했다. 복면강도 2명은 3억 원이 든 현금 가방을 빼앗고, 저항하던 은행 직원에게 실탄까지 쐈다. 3중 선팅 된 검은색 차로 폐쇄회로(CC)TV가 없던 인근 지하주차장으로 이동한 이들은 하얀색 차로 갈아탄 뒤 사라졌다. 버려진 차에는 지문까지 닦여 있었다. 경찰은 은행 강도 영화를 빌려 본 사람들까지 1만 명 넘게 조사했지만 좀처럼 증거를 찾지 못했다.

▷16년 뒤 경찰은 압수물 창고에 오랫동안 보관하고 있던 차량 속 손수건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냈다. 기존 수사 때는 범인의 신원을 추정할 수 있는 혈액형과 지문 정보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국과수가 얼마 뒤 손수건에서 유전자(DNA) 정보를 찾아냈다. 범행 당시 얼굴을 가리던 용도로 쓰인 손수건에 땀이나 침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사기관이 보관 중이던 수십만 명의 범죄자 DNA 정보와는 일치하지 않았다.

▷수사팀은 손수건 속 DNA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재수사에 나섰다. “최소 5년은 잡고 가자. 우리가 못하면 우리 자식을 경찰 시켜서라도 하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수개월 전 경찰은 50대 초반의 용의자 A 씨가 범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A 씨가 버린 담배꽁초를 입수했다. 담배꽁초와 손수건의 DNA 정보는 똑같았다. 경찰은 범행 21년 만인 27일 A 씨와 공범 B 씨를 동시에 구속 수감했다.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가 연장되지 않았다면 강도 살인 사건의 진범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사건의 공소시효는 당초 범행 15년 뒤인 2016년 12월까지였다. 2007년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가 25년으로 늘어났지만 법 시행 이전에 발생한 은행 강도 살인 사건은 소급 적용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2015년 7월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없애는 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법 시행 시점을 기준으로 공소시효가 남아 있던 2000년 8월 1일 이후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가 무기한으로 늘어났다. 이때부터 살인 미제 사건 수사가 속도를 냈다.

▷3년 전 ‘화성 연쇄 살인사건’의 진범 이춘재가 33년 만에 붙잡혔던 것은 피해자 속옷의 미세한 땀방울까지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DNA 분석 기법이 정교해졌기 때문이다.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를 없앤 것은 피해자 유족의 응어리를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한 것이다. 은행 강도 살인 사건처럼 경찰이 추적 중인 미제 사건이 아직 279건이 더 있다고 한다. 경찰은 ‘완전 범죄는 없다’는 집념을 갖고, 조그마한 단서라도 끝까지 추적해야 한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