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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해방클럽’[2030세상/김지영]

입력 | 2022-08-30 03:00:00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올 초 단짝 친구 M이 근방으로 이사를 왔다. 하지만 만날 엄두를 내기란 역시 쉽지 않았다. 얼마 전 처음으로 함께 동네 맛집을 찾았는데 내내 행복하다 노래를 불렀다. 도보 거리에 이렇게 확실한 행복이 있었는데, 뭐가 그리 바빠 얼굴 한 번을 못 봤을까. “야! 다음 주에도 봐! 아지트 만들어!”

그렇게 한 주 만에 찾은 곳은 중간 지점의 아기자기한 바. 수다는 마를 줄을 몰랐다. 해에 한두 번 보는 게 고작이라 굵직한 어젠다가 산더미였는데, 그 자리를 시시콜콜한 근황들이 메웠다. M은 최근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몰아봤다 했다. 나는 처음 듣는 그의 드라마 취향을 사랑스럽게 지켜보다 말했다.

“내 행복의 지름길이 여기 있었네.” 기다리는 가족이 있어서, 해야 하는 일도,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아서. 한 친구를 ‘자주’ 보기에는 왜인지 죄책감이 들었다. 만나면 행복할 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몇 달 뒤를 기약했다. “그런데, 우리 일주일에 2시간 정도는 행복해도 되는 거 아닌가?” 더 자주 행복하자, 더 자주 보자, 그렇게 다짐했다.

와인 두 병을 다 비우고 충동적으로 위스키 한 병을 더 시켰다. “여기 킵 되나요?” 의식처럼 반 잔씩을 앞에 따르고 네임펜을 빌려 둘의 이름을 병에 새겼다. 평소 딱히 위스키를 즐기는 편도 아닌데, 그 물성 자체보다는 ‘킵’ 한다는 행위에서 오는 감정을 공유하고 싶었다. ‘여기 내 위안이 있다’는 주문 같은 것. 틀림없이 다시 이곳을 찾을 것이라는,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날 것이라는 약속, 확신, 증표 같은 것.

그게 벌써 한 달도 더 전의 일이다. 그 뒤 나는 혼자, 그는 가족과 한 번씩 그곳을 찾았다. 어느 지친 저녁 홀연히 들렀다 마침 상대편이 한달음에 달려오는 그런 드라마 같은 일은 아직 생기지 않았고,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진귀한 재미를 알게 됐는데, 홀로 찾은 저녁, 병에 적힌 익숙한 필체가 말을 걸어오는 듯 소란해 웃음이 났다. 나는 또 펜을 빌려 언젠가 올 M에게 메시지를 남겼고 후에 찾은 그가 또 답신을 남기는 바람에, 병 하나를 두고 뜻밖의 펜팔을 주고받고 있다.

혼자여도 함께인 느낌. 볼 수 없어도 서로의 이름과 함께한다는 든든함 같은 것.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추앙은 어떻게 하는 건데?” 묻는 구씨(손석구 분)에게 염미정(김지원 분)은 답한다. “응원하는 거.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거.”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그 공간, 우리가 누린 것은 보이지 않아도 서로를 ‘추앙’하는 존재가 있다는 자각이다.

“해방되고 싶어요. 갑갑하고 답답하고 뚫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미정의 말마따나 뚫고 나가고 싶은 어느 날, 다시 그곳을 찾을 것이다. 그곳에서 서로를 향한 맹목적 응원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를 밑천 삼아 구멍 난 마음을 부지런히 기워 나갈 것이다. 미정을 변화시킨 것은 구씨의 추앙이었지만, 해방시킨 것은 결국 미정 자신이었으므로.

가게 이름도 기가 막히게 ‘○○케이지’다. 해방되기 위해 기꺼이 갇히는 벗과 술이 있는 공간, 우리들의 ‘해방클럽’. 드라마는 이제 시작됐다.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