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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이 두 뺨처럼 발그레한 광한루… 스치기만 해도 빨갛게 물들겠네[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입력 | 2022-09-03 03:00:00

진한 문학의 향기 남원
남녀간 사랑이 시작되는 곳
단풍명소 뱀사골과 호젓한 간이역
숲속미술관-카페가 있는 풍경




전북 남원은 사랑의 고을이자 문학의 고향이다. 지리산의 힘찬 산세와 섬진강의 부드러운 물결이 시작되는 남원 곳곳에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판소리 ‘춘향전’의 탄생지이고, ‘흥보가’의 흥부와 놀부가 살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만복사지에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판타지 사랑 이야기인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펼쳐지고, 서도역의 철길 위에는 작가 최명희가 남긴 불멸의 현대 문학 ‘혼불’이 이글거린다.》

춘향이와 이몽룡이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던 남원 광한루(廣寒樓)는 해 질 녘에 환상적인 야경이 펼쳐진다. 광한루는 달나라 궁전 ‘광한청허루(廣寒淸虛樓)’에서 따온 말이다. 우주 속 은하수처럼 ‘넓고 차가운’ 광한루는 밤에 보면 더욱 신비로운 누각이다.



○ 만복사와 광한루의 사랑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의 배경인 만복사지를 지키고 있는 높이 5m 석인상.

남원시 왕정동 벌판에 불그스레한 노을이 번질 즈음. 텅 빈 만복사지를 지키고 있는 석인상의 두 눈은 튀어나올 것만 같다. 풀밭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고려시대 보물급 오층석탑과 당간지주, 석불입상, 연꽃무늬 불상 좌대가 마치 연극배우가 대사를 하고 있는 듯하다. 바로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쓴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에 나오는 ‘만복사저포기’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다.

만복사에 머무르던 흙수저 노총각 양생(梁生).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하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빌고 있다. 금오신화에 나오는 양생, 한생, 박생이란 주인공 이름의 ‘생’은 생원의 준말이다. 조선시대 소과(小科)인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만, 향리의 가난한 선비를 올려주는 호칭이기도 했다. 어느 날 양생은 부처님과 저포놀이(윷놀이 비슷한 막대 주사위 놀이) 한판 승부를 벌인다. 게임에서 이긴 양생은 절에서 아리따운 여인을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여인과 사흘을 함께 보내고, 친구들과 함께 시를 지으며 놀았던 양생은 마지막 날 여인으로부터 은그릇을 선물로 받는다. 그런데 다음 날 만난 그녀의 부모님은 “3년 전에 왜구의 침입 때 죽은 딸의 무덤에 함께 묻어준 은그릇을 어떻게 갖고 있느냐”며 놀란다. 결국 양생은 억울하게 죽었던 여인의 환생을 위해 천도재를 올려주고, 자신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평생토록 지리산의 약초꾼으로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만복사저포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한다면 게임과 판타지, 멜로와 호러가 섞인 복합 장르물 영화가 탄생할 법하다. 춘향전이 한 남자를 사랑한 여자의 지조와 정절을 노래했다면, 만복사저포기는 만날 수 없는 여인에 대한 남자의 변치 않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남원 시내는 거대한 춘향전 테마파크로 봐도 과언이 아니다. 구룡계곡 입구 육모정 앞에는 소설 속 허구 인물인 춘향이의 무덤까지 조성돼 있다. 매해 춘향제 때마다 제사도 지낸다고 한다. 백년가약을 약속했던 이몽룡이 한양으로 떠날 때 춘향이가 따라 나와 눈물로 작별했던 정자인 ‘오리정(五里亭)’에는 ‘춘향이 눈물방죽’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오리정에서 북쪽으로는 춘향고개가 있고, 춘향이 이별하는 아픔에 허둥지둥 따라가다 버선이 벗겨졌다는 ‘춘향이 버선밭’도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백미는 광한루(廣寒樓) 야경이다. 광한루는 미인 항아가 살고 있는 달나라 궁전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를 닮았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완월정(玩月亭)의 호수에는 달빛이 비치고, 광한루 앞에는 세 개의 섬이 떠 있다. 몽룡과 춘향이 함께 걷던 오작교는 난간이 없는 돌다리여서 자칫 물에 빠질 것 같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연인끼리 걸으면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남원의 대표적인 명소인 만복사와 광한루는 정유재란(1597년) 때 불타 없어졌다.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을 지키던 병사들과 남녀 백성 1만여 명은 몰살을 당해 ‘만인의총’에 묻혔다. 만복사저포기에서 왜구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여인의 비극이 100년 후 실제로 벌어졌던 것이다. 만복사는 이후 빈터로 남았고, 광한루는 인조 때 다시 지어졌다.
○뱀사골 계곡에서 만난 천년송

지리산 와운마을 천년송.

남원에서 지리산을 오르는 뱀사골 계곡은 여름 피서와 가을 단풍으로 유명하다. 지리산국립공원 전북사무소에서 와운(臥雲)마을 천년송(千年松)까지 걷는 ‘뱀사골 신선길’(2.3km)은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편안한 트레킹 코스다. 용이 노는 요룡소, 멧돼지가 노는 돗소(돗은 남원 사투리 ‘돼지’), 호리병 같은 병소 등 수많은 전설이 깃든 물길을 감상하며 덱길을 걷는다. 30여 분을 걷다 보니 구름도 쉬어간다는 와운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뒤편에 우람한 천년송이 시원하게 뻗어 있다. 하늘을 향해 꿈틀대며 오르는 자태 하며 천년 세월의 두꺼운 용비늘 모양까지, 과연 우리나라 최고의 소나무(천연기념물 424호)로 불릴 만하다. 이 천년송은 할머니 소나무로 불리는데, 20여 m 더 올라간 지점에 할아버지 소나무도 있다. 화려하고 우람한 할머니 소나무와 달리 할아버지 소나무는 S자 모양의 맵시 있는 몸매를 자랑한다. 남녀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두 소나무에도 남원의 색다른 사랑 전설이 담겨 있지 않을까 궁금해진다.

일제강점기 나무로 지어진 서도역 주변에는 최명희 작가의 ‘혼불문학관’이 있다.

남원 노봉마을 서도역에는 최명희 작가(1947∼1988)의 ‘혼불 문학관’이 있다. 19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된 ‘혼불’은 1995년까지 월간 ‘신동아’에 연재됐던 작품. 일제강점기인 1930, 40년대 남원 지방의 ‘매안 이씨’ 문중을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이다. 세시풍속, 관혼상제, 음식, 노래를 판소리처럼 운율 있는 언어로 담아낸 ‘혼불’은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 비견되는 소중한 언어의 보고로 평가받고 있다. 1934년 개장한 서도역은 소설 속 인물인 효원이 시집가던 날 “점잖은 밥 한상 천천히 다 먹을 만한 시간이면 닿는 정거장”이라는 구절로 묘사된다. 서도역 앞에는 아름드리 고목과 호젓한 철길이 남아 있다.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 기차역 장면도 서도역에서 찍었다.
○숲속 미술관과 카페

운봉읍 행정마을 서어나무숲 숲멍 피크닉 체험.

남원시 운봉읍 행정리의 ‘서어나무숲’에 들어서면 한여름에도 서늘한 나무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이곳은 200여 년 전에 조성한 마을 숲으로 90여 그루의 아름드리 근육질을 뽐내는 개서어나무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다. 마을 숲은 홍수와 바람을 막고, 땅의 기운이 센 곳은 눌러 주고 허(虛)한 곳은 보(補)해 주는 비보림(裨補林)이다. 서어나무 숲속에서는 새소리, 바람소리를 ASMR 장비로 듣고, 지역 특산물인 김부각 위에 치즈를 올린 디저트를 먹으며 피크닉을 하는 ‘숲멍 체험’ 프로그램도 즐길 수 있다.

이백면에 있는 ‘아담원(我談苑)’도 숲과 미술관, 카페가 잘 어우러진 휴식처다. 원래 나무를 키우던 조경 농원이었는데 2018년 11월 ‘나와 나누는 대화’라는 뜻의 아담원으로 재탄생했다. 수목원 내 산책길을 걷다 보면 글라스 하우스 형태의 미술관을 만난다. 미국의 조각가 로버트 모어랜드가 만든 빨간색 산 모양의 작품,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앞 분수대에서 만날 수 있는 니키 드 생팔의 조각품이 전시돼 있다.

노출 콘크리트 기법으로 지어진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의 연못.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에서는 ‘화첩기행’으로 유명한 남원 출신 작가 김병종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다. 춘향테마파크 뒤편에 노출 콘크리트로 지어진 미술관 앞은 바닥에 물이 담겨 있어 하늘과 구름, 나무가 반사되는 한가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미술관 내 북카페 ‘화첩기행’은 너무 맛있어 미안하다는 ‘미안커피’와 직접 만든 케이크가 인기다.

남원에 들렀다면 여름 보양식의 상징인 추어탕을 맛봐야 한다. 광한루 근처에는 추어탕집이 즐비한 ‘추어 거리’가 있다. 남원 추어탕 맛을 내는 미꾸리는 미꾸라지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다. 미꾸리는 미꾸라지에 비해 수염이 짧고, 성어 기간이 2년으로 미꾸라지보다 갑절이나 길다. 그만큼 귀한 음식 재료로 만든 ‘남원 추어탕’은 뼈째 갈아서 먹는 방식이지만, 통째로 익혀서 부추와 함께 먹는 ‘추어 숙회’도 별미다.




글·사진 남원=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