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횡설수설/장택동]올리가르히 잇단 의문사

입력 | 2022-09-03 03:00:00


199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부시장으로 일하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중앙 무대로 끌어올려 준 사람은 보리스 베레좁스키였다. 올리가르히(러시아 신흥 재벌)의 상징인 베레좁스키의 후원으로 푸틴은 크렘린에 부국장으로 입성했고 총리를 거쳐 2000년 대권을 잡았다. 하지만 푸틴이 대통령이 된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멀어졌고, 결국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 베레좁스키는 2013년 자택 욕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푸틴 시대 올리가르히의 첫 의문사였다.

▷러시아의 최대 민영 석유업체인 루크오일의 라빌 마가노프 회장이 1일 모스크바의 병원에서 추락사했다. 러시아 국영 매체들은 그가 우울증 치료제를 복용했다면서 극단적 선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다 실족한 것이라는 민간 매체의 보도도 나왔다. 하지만 서방 언론들은 루크오일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무력 충돌이 최대한 빨리 끝나기를 바란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비판적 자세를 보였다는 점에서 마가노프의 죽음에 러시아 당국의 개입을 의심하는 분위기다.

▷앞서 4월 러시아 액화천연가스 기업 노바테크 전 부회장이 스페인에서, 국영 천연가스 기업 가스프롬 자회사 가스프롬은행의 전 부회장은 모스크바에서 각각 가족들과 함께 사망했다. 이어 5월에는 가스프롬 소유 리조트의 임원이 절벽에서 추락해 숨졌다. 이처럼 올해 들어 올리가르히의 석연치 않은 죽음이 잇따르고 있지만 자살인지 타살인지조차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사망 배경에 대한 궁금증만 계속 커질 뿐이다.

▷올리가르히는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국영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이들은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을 지지하며 경제와 정치에서 영향력을 확대했고 정부와 올리가르히는 상부상조하는 관계였다. 하지만 푸틴은 “기업인들은 정치판에 기웃거리지 말라”고 견제하면서 독자적으로 권력을 구축해 나갔다. 이후 최대 부호였던 미하일 호도르콥스키 전 유코스 회장이 10년간 옥살이를 하고 망명길에 오르는 등 반(反)푸틴 성향의 올리가르히는 축출되고 친푸틴 기업인들만 남았다.

▷푸틴은 KGB와 군대 등 안보·정보를 담당하던 부처 출신의 이른바 ‘실로비키’를 중용해 통치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그동안 올리가르히뿐 아니라 야권 정치인 알렉세이 나발니, 보리스 넴초프 전 부총리 등 푸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암살되거나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 러시아 선거법상 푸틴은 2036년까지 집권이 가능하다. 푸틴의 철권통치가 계속된다면 러시아에 의문사의 그림자가 사라질 날은 아직 멀어 보인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