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한루.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전북 남원은 사랑의 고을이자 문학의 고향이다. 지리산의 힘찬 산세와 섬진강의 부드러운 물결이 시작되는 남원 곳곳에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판소리 ‘춘향전’의 탄생지이고, ‘흥보가’의 흥부와 놀부가 살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만복사지에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판타지 사랑 이야기인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펼쳐지고, 서도역의 철길 위에는 작가 최명희가 남긴 불멸의 현대 문학 ‘혼불’이 이글거린다.
● 만복사와 광한루의 사랑
만복사지.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만복사에 머무르던 흙수저 노총각 양생(梁生).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하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빌고 있다. 금오신화에 나오는 양생, 한생, 박생이란 주인공 이름의 ‘생’은 생원의 준말이다. 조선시대 소과(小科)인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만, 향리의 가난한 선비를 올려주는 호칭이기도 했다. 어느 날 양생은 부처님과 저포놀이(윷놀이 비슷한 막대 주사위 놀이) 한판 승부를 벌인다. 게임에서 이긴 양생은 절에서 아리따운 여인을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여인과 사흘을 함께 보내고, 친구들과 함께 시를 지으며 놀았던 양생은 마지막 날 여인으로부터 은그릇을 선물로 받는다. 그런데 다음 날 만난 그녀의 부모님은 “3년 전에 왜구의 침입 때 죽은 딸의 무덤에 함께 묻어준 은그릇을 어떻게 갖고 있느냐”며 놀란다. 결국 양생은 억울하게 죽었던 여인의 환생을 위해 천도재를 올려주고, 자신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평생토록 지리산의 약초꾼으로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육모정에서 바라본 춘향묘.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백미는 광한루 야경이다. 광한루(廣寒樓)는 미인 항아가 살고 있는 달나라 궁전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를 닮았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완월정(玩月亭)의 호수에는 달빛이 비치고, 광한루 앞에는 세 개의 섬이 떠 있다. 몽룡과 춘향이 함께 걷던 오작교는 난간이 없는 돌다리여서 자칫 물에 빠질 것 같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연인끼리 걸으면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남원의 대표적인 명소인 만복사와 광한루는 정유재란(1597년) 때 불타 없어졌다.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을 지키던 병사들과 남녀 백성 1만여 명은 몰살을 당해 ‘만인의총’에 묻혔다. 만복사저포기에서 왜구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여인의 비극이 100년 후 실제로 벌어졌던 것이다. 만복사는 이후 빈터로 남았고, 광한루는 인조 때 다시 지어졌다.
● 뱀사골 계곡에서 만난 천년송
뱀사골 계곡.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천년송.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남원에서 지리산을 오르는 뱀사골 계곡은 여름 피서와 가을 단풍으로 유명하다. 지리산국립공원 전북사무소에서 와운(臥雲)마을 천년송(千年松)까지 걷는 ‘뱀사골 신선길’(2.3km)은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편안한 트레킹 코스다. 용이 노는 요룡소, 멧돼지가 노는 돗소(돗은 남원 사투리 ‘돼지’), 호리병 같은 병소 등 수많은 전설이 깃든 물길을 감상하며 덱길을 걷는다. 30여 분을 걷다 보니 구름도 쉬어간다는 와운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뒤편에 우람한 천년송이 시원하게 뻗어 있다. 하늘을 향해 꿈틀대며 오르는 자태하며 천년 세월의 두꺼운 용비늘 모양까지, 과연 우리나라 최고의 소나무(천연기념물 424호)로 불릴 만하다. 이 천년송은 할머니 소나무로 불리는데, 20여 m 더 올라간 지점에 할아버지 소나무도 있다. 화려하고 우람한 할머니 소나무와 달리 할아버지 소나무는 S자 모양의 맵시 있는 몸매를 자랑한다. 남녀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두 소나무에도 남원의 색다른 사랑 전설이 담겨 있지 않을까 궁금해진다.
서도역.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남원 노봉마을 서도역에는 최명희 작가(1947~1988)의 ‘혼불 문학관’이 있다. 19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된 ‘혼불’은 1995년까지 월간 ‘신동아’에 연재됐던 작품. 일제강점기인 1930, 40년대 남원 지방의 ‘매안 이씨’ 문중을 배경으로 한 대하소설이다. 세시풍속, 관혼상제, 음식, 노래를 판소리처럼 운율 있는 언어로 담아낸 ‘혼불’은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 비견되는 소중한 언어의 보고로 평가받고 있다. 1934년 개장한 서도역은 소설 속 인물인 효원이 시집가던 날 “점잖은 밥 한상 천천히 다 먹을 만한 시간이면 닿는 정거장”이라는 구절로 묘사된다. 서도역 앞에는 아름드리 고목과 호젓한 철길이 남아 있다.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 기차역 장면도 서도역에서 찍었다.
● 숲속 미술관과 카페
서어나무숲.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이백면에 있는 ‘아담원(我談苑)’도 숲과 미술관, 카페가 잘 어우러진 휴식처다. 원래 나무를 키우던 조경 농원이었는데 2018년 11월 ‘나와 나누는 대화’라는 뜻의 아담원으로 재탄생했다. 수목원 내 산책길을 걷다 보면 글라스 하우스 형태의 미술관을 만난다. 미국의 조각가 로버트 모어랜드가 만든 빨간색 산 모양의 작품,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앞 분수대에서 만날 수 있는 니키 드 생팔의 조각품이 전시돼 있다.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은 ‘화첩기행’으로 유명한 남원 출신 작가 김병종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다. 춘향테마파크 뒤편에 노출콘크리트로 지어진 미술관 앞은 바닥에 물이 담겨 있어 하늘과 구름, 나무가 반사되는 한가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미술관 내 북카페 ‘화첩기행’은 너무 맛있어 미안하다는 ‘미안커피’와 직접 만든 케이크가 인기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