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예산안서 무리한 포퓰리즘 엿봐 인플레와 여론 역풍에 전전긍긍하면 위기 냉철함 부족한 정책에 ‘폭탄’ 터질 수도
이지홍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대통령 지지율이 취임 100일도 안 돼 20%대로 곤두박질치며 정부와 여당이 대혼란 상태에 빠졌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입법부의 주된 기능은 국민들을 대표해 행정부를 감시하는 일이다. 함량 미달 정치인들의 작태를 보다 못한 국민들이 정치와 입법 경험이라곤 전무한 행정부 엘리트를 행정부의 수장으로 선택했지만, 막상 미숙함이 드러나자 바로 또 철퇴를 날리고 있다. 경제 위기까지 맞물리며 지지율 회복과 국정 동력 확보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일까. 포퓰리즘의 조짐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어 우려된다.
먼저 정부가 지난주 발표한 내년도 예산안을 보자. 이번에 책정된 639조 원은 올해 본예산 608조 원보다 5.2% 증가한 규모다. 딱 최저임금 인상률만큼 늘어난다. 증가 폭이 문재인 정부 때보다 작고 액수도 추경을 합한 올해 총지출 680조 원보다 적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지만 5년 전과 비교하면 여전히 210조 원이나 늘어난 초(超)슈퍼 예산이다.
작년 이맘때였으면 또 모르겠다. 한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글로벌 경제가 한 발 한 발 장기 침체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인플레가 정점에 도달하면 끝이라고 착각해선 안 된다. 현 위기의 본질은 글로벌 경제가 생산하는 물자와 서비스의 총량이 줄어든 것이다. 인플레와 천장 뚫린 환율은 이런 실물경제 쇼크의 한 증상일 뿐이다. 인플레가 사라진다 해도 그 총량은 바로 회복되지 않는다. 한번 올라간 생필품 가격은 다시 내려가지 않는다. 충격의 크기를 10%로만 잡아도 매년 2∼3%씩 기술과 생산성이 발전해선 앞으로 3∼4년이 지나야만 겨우 이전 생활수준에 도달하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라고 추경을 안 한다는 보장도 없다. 이미 전력(前歷)이 있는 데다 지금 추세론 내년 경기는 올해보다도 더 안 좋아질 공산이 크다. 세수는 줄고 쓸 곳은 많아질 텐데 후년엔 국회의원 선거까지 예정돼 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민주 국가의 정상적인 정당 활동을 기대하기 힘든 게 한국 정치의 현주소다. 국가의 미래를 위한 개혁 어젠다를 두고 좌우가 진지하게 경쟁을 해도 부족할 판에 현금 살포와 네거티브 공방만 난무하는 암울한 그림이 벌써부터 그려진다.
이뿐만이 아니다. 손실보상금 23조 원을 뿌린 지 얼마나 됐다고 금융위원회가 자영업자 부채 탕감에 나선다. 대형마트 의무 휴업 폐지도 국민투표까지 하고 흐지부지됐다. 대체 언제까지 지원과 보호에만 매달릴 건가. 최저임금부터 낮춰야 하는 건 아닌가. 공정거래위원회는 하청업체에 물가 상승분을 반영해주는 기업을 우대하겠다고 하고, 이를 아예 법제화하는 ‘납품단가 연동제’는 중소벤처기업부 주도로 시범 운영에 들어갔다. 시대착오적이며 공정하지도 않은 반(反)시장 규제다. 전기요금 딜레마에 빠진 산업통상자원부 역시 인플레와 여론의 역풍이 두려워 이도 저도 못 하고 한전에 적자만 쌓고 있다. 에너지야말로 당장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위기의 진원이다. 국가 차원의 낭비가 발생하므로 전기요금을 마냥 낮게 유지하는 것이 결코 능사가 아니다. 가격을 올리되 저소득층 위주로 환불을 해주거나 현금을 지원하는 방법도 있다.
야당은 어려울 때 쓰는 게 국가 재정이라며 정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온갖 불만과 요구사항들이 앞으로도 계속 터져 나올 것이다. 지금 우왕좌왕하면 내년엔 모든 아우성을 다 들어줘야 하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구조 개혁과 민간 주도 성장은 물 건너가고 또다시 폭탄 돌리기와 소득 주도 성장에 나라를 의탁하게 된다. 정치가 절실한 시점인 건 맞지만 그게 인기 영합주의는 아니다. 따뜻한 마음도 냉철한 머리가 받쳐줄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다. 이번엔 폭탄이 진짜 터질지도 모른다.
이지홍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