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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한 의학전문기자의 메디컬 리포트]어느 소아암 의사의 호소문

입력 | 2022-09-09 03:00:00

전국 시도별 소아암 진료 의사 현황. 강원, 경북 지역에는 담당 의사가 아예 한 명도 없다. 대한소아혈액종양학회 제공

이진한 의학전문기자


“요즘 학회마다 필수중증의료강화 정책 지원에 어떻게든 참여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도 소아암은 안 나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이런 거 만들어 낼 여력이 없습니다.”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과 부교수인 김혜리 교수가 절망에 섞인 이메일을 기자에게 보냈다. 최근 서울아산병원 간호사 사망 이후 정부 차원에서 필수 의료 강화 방안이 논의되고 있는 가운데 중증필수진료의 사각지대인 국내 소아암 치료 현실을 알린 것이다.

소아암은 국내에서 연간 1000∼1500여 명 발생한다. 소아암의 대표적인 질환들은 백혈병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 뇌종양, 호지킨림프종, 골암, 연부조직암 등의 순이다.

하지만 이들을 치료할 소아암 진료 의사는 전국적으로 68명에 불과하다. 게다가 5년 뒤엔 소아암 의료 공백도 우려된다. 이들 중에서 25%가 5년 내에 정년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최근 5년간 신규 소아혈액종양 전문의 수는 연평균 2.4명에 불과하다.

현재 강원, 경북 지역엔 소아암 담당 의사가 한 명도 없다. 이 지역에선 소아암 치료를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충북, 광주, 제주, 울산도 소아암 진료 의사가 단 1명으로 입원 치료가 쉽지 않다. 소아암 환자에게는 365일 24시간 응급상황에 대처할 전문의가 병원마다 최소 두세 명 이상 필요하다. 하지만 열악한 인력 인프라로 인해 지방 병원에서는 한두 명의 전문의가 주말도 없이 매일 환자를 관리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초 발표한 ‘제4차 암 관리 종합계획’에서 ‘어디서나 암 걱정 없는 건강한 나라’라는 비전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소아암 환자들은 오래전부터 어디에 있든 치료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김 교수는 “소아암을 치료하는 필수중증의료 의사들은 기자 간담회를 하거나 복지부 담당자를 만나 목소리를 높일 시간도, 여력도 없다는 게 문제다”라면서 “저출산 시대에 귀한 아이가 소아암에 걸렸는데 소아암을 치료할 의사도, 병원도 없다는 게 이해가 되느냐”고 절망했다. 소아암은 암 정책에도, 소아청소년과 질환에도, 희귀 질환에도 포함되지 못하는 ‘깍두기 신세’인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서울 외 지역에 사는 소아암 환자의 70%가 서울과 경기도에서 치료를 받는다. 소아암 환자가 응급실에 오려면 5∼6시간씩 운전해서 서울, 경기 지역까지 와야 한다. 치료 기간도 2∼3년이 걸린다. 그동안 가족들은 엄청난 경제적 부담에 시달리고, 그러다 보면 가족이 붕괴되는 경우도 많다.

일본과 미국의 경우 소아암에 대해선 지원이 각별하다. 일본은 거의 국가 부담으로 소아암을 치료하고, 일본과 미국 모두 소아암에 대한 독자적인 법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법 조항도 없고, 희귀 질환이나 전체 암에 끼워서 보는 암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소아암의 치료는 성인암과는 완전히 다르다. 성인암의 축소판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아암은 타과 협력이 필수인 데다 성인처럼 정형화된 치료 가이드라인도 없다. 또 소아암 환자들은 대부분 어른처럼 증상을 잘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료진이 꼭 붙어서 더 철저히 관리해야 된다. 더구나 어른처럼 생명을 연장하는 게 치료의 목표가 아니어서 30, 40대 성인이 돼도 소아과에서 합병증을 봐야 하는 질환이다.

소아암은 주로 조혈모세포이식, 항암치료, 방사선치료, 면역치료, 뇌수술 등 고난도 치료를 받는다. 다행히 이러한 치료를 통해 선진국 수준의 높은 완치율(80%) 성적을 내고 있다.

그러나 소아암 진료 의사의 미래는 암울하다. 최근 소아과 전공의 지원율을 보면 향후 그 인력이 충원될 가능성도 낮다. 그리고 각 병원에서는 소아암을 안 보고 싶어 한다. 돈도 안 되고 위험도 크기 때문이다.

소아암을 진료하는 한 의료진은 “아픈 아이에게 관심도 없으면서 아이만 나으라고 하면 뭐하느냐. 출산장려 정책만 나오면 한숨이 난다. 소아혈액종양 전문의들이 사명감으로 버티기엔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현장에선 건강보험 수가 구조 개선뿐만 아니라 국가적 지원 없이는 소아암 전문의가 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김 교수는 “5년 뒤 전국에서 50명이 정년퇴직할 때까지 36시간 연속 근무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이런 근무 환경에서 일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진한 의학전문기자 liked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