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여왕 서거] 20세 때 英 여자국방군 자원입대… 26세 즉위, 신중한 정치적 목소리 다이애나빈 사망 땐 왕실폐지론 나와…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권위 지켜내 한국 방문해 하회마을 찾기도… 지난해 필립公 떠난 뒤 건강 악화 英 국민 “탁월했던 지도자 잃어”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연두색 의상)이 2016년 6월 11일 90세 생일 기념 공식 축하행사에서 영국 공군 곡예비행단의 축하비행을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던 모습. 사진 왼 쪽부터 캐서린 세손빈, 샬럿 공주, 조지 왕자, 윌리엄 왕세손, 여왕, 필립 공. 런던=신화 뉴시스
완벽한 여왕으로서의 삶
1926년 4월 21일 태어난 엘리자베스는 부친 조지 6세가 왕위에 즉위한 10세 때 본격적으로 통치자 수업을 받았다. 제2차 대전 때는 대대로 왕의 여름 거처인 스코틀랜드 밸모럴성(城)과 윈저궁을 오가며 시간을 보냈다.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아기일 때 찍힌 사진. 동아일보DB
엘리자베스는 스무 살 되던 1945년 조지 6세에게 “조국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밝힌 뒤 영국 여자국방군에 자원입대했다. 군번 ‘230873’을 달고 군용트럭 운전사로 복무했다. 이때 평생 반려자 필립 왕자를 만났다.
1947년 필립 공과의 결혼식 사진. 동아일보DB
조지 6세의 건강이 악화된 1950년대 들어 엘리자베스는 왕실 행사를 대행했다. 1951년 10월 캐나다 미국 순방을 시작으로 영연방 국가를 돌아다니다가 이듬해 1월 조지 6세가 별세했다. 엘리자베스는 한동안 공적인 일에서 손을 놓고 부친을 애도하다 1953년 6월 전 세계 2500만 명이 TV로 지켜보는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공식 명칭은 ‘엘리자베스 2세, 신의 가호 아래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그리고 모든 소유지의 통치자, 영연방 수장이며 신앙의 옹호자’.
즉위 당시 대영제국의 위상은 무너졌으며 식민지들은 속속 지배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영국 내부도 복지국가를 지향하면서 왕실의 존재에 깊은 회의감을 갖기 시작했다. 왕실이 변하지 않으면 존속 자체가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는 영연방 국가들만이라도 돈독한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1953년 11월부터 6개월간 순방했다. 호주와 뉴질랜드 순방은 영국 왕으로는 전례가 없었고, 인도에는 영국 군주로서 50년 만에 방문했다. 1977년 즉위 25주년에 35개국 영연방 지도자들이 축하연에 참석하는 결실을 얻었다. 1956년 총리 교체 시기에 보수당 해럴드 맥밀런을 차기 총리로 밀어붙이며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도 했다. 1999년 4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영국 국가 원수로는 최초로 3박 4일간 방한해 서울과 경북 안동 하회마을을 찾았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1999년 4월 21일 경북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한 당시 전통 한옥 ‘담연재’에서 안동소주 기능보유자인 인간문화재 조옥화 씨가 차린 73번째 생일상을 받는 모습. 동아일보DB
자손 걱정 컸던 어머니
여왕으로는 완벽에 가까웠지만 끊임없이 스캔들에 연루된 자손 문제로 항상 고민이 컸다.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오른쪽)이 1987년 아들 찰스 왕세자의 집무실에서 며느리였던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함께 웃으며 시간을 보내던 모습.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이 사진이 찍히고 9년 후인 1996년 찰스 왕세자와 이혼했고 이듬해인 1997년 교통사고로 숨졌다. AP=뉴시스
딸 앤 공주(72)는 평민 필립 대위와 결혼했다가 파경을 맞았다. 자식 넷 중 에드워드 왕자를 빼면 모두 이혼 경험이 있다. 2019년에는 앤드루 왕자가 아동 성범죄를 저지른 미국 억만장자 제프리 엡스타인이 소개한 10대 여성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의혹이 불거져 재판까지 받았다. 2020년 3월에는 해리 왕손(38)과 메건 마클 왕손빈(41) 부부가 왕실과의 불화 끝에 결별하며 미국 캘리포니아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 과정에서 해리와 형 윌리엄 왕세손(40)의 ‘형제 갈등’도 불거졌다.
이런 가족 문제에도 영국 사회에서 군주가 상징적 통치자 명맥을 잇는 것은 엘리자베스 여왕 덕분이었다. 그는 가장 부유한 여성에 속했지만 검소했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윈스턴 처칠부터 영국 총리 15명과 함께하며 신중하게 정치적 목소리를 냈다.
남편 잃은 상실감에 건강 악화
고령에도 활발하게 외교 및 사회 활동을 했지만 90세를 넘자 건강 문제가 주기적으로 발생했다. 2016년 크리스마스 무렵에는 연례행사처럼 들르던 별장에 가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쇠해 위독설(說)이 돌았다.지난해 10월 12일에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영국 왕립군 출범 100주년 기념 예배에 처음으로 지팡이를 짚고 나타났다. 같은 달 20일에는 ‘휴식을 취하라’는 의료진의 권고에 따라 입원했다가 하루 뒤 윈저성으로 복귀했다. “여전히 건강 상태는 좋다”고 버킹엄궁은 밝혔지만 몸 상태가 예전만 못하다는 우려는 계속됐다.
강성휘 특파원 yolo@donga.com
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