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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힘드신가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드립니다”[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입력 | 2022-09-11 08:00:00

하상훈 한국생명의전화 원장
한국생명의전화, 46년간 24시간 운영
자살·심리상담 전화 100만 통 기록
9월 10일 ‘세계 자살예방의 날’ 제정
“자살예방도 ‘포스트코로나’ 대비 필수
명절에 고립감 더 깊어져…주변 돌아봐야”





정신 건강, 정서 문제 등 마음(心) 깊은 곳(深)에 있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어느 늦은 밤 한 교회 사무실 전화기가 울렸다.

혼자 설교 준비를 하던 목사가 수화기를 들자 한 청년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년은 “큰 빚을 지게 돼 깊은 절망에 빠졌고, 사는 것이 괴롭다”고 토로했다. 목사는 안타까워하며 청년에게 위로와 조언을 건네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청년은 가스 찬 방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채 발견됐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새벽 2시, 교회로 또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이번엔 한 여성이 울먹이며 도움을 청했다. 목사는 앞서 떠난 청년을 떠올리며 1시간 동안 이야기를 경청하고 깊이 공감해줬다. 그 여성은 다음날 교회에 찾아와 목사에게 “살아갈 힘과 용기를 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1962년 ‘생명의 전화(Life Line)’의 효시가 된 호주 시드니 중앙감리교회의 알렌 워커 목사 이야기다. 알렌 워커 목사는 전화상담으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고 확신하고 24시간 4교대로 돌아가는 상담센터를 설립했다. 그로부터 14년 뒤인 1976년 9월 한국생명의전화가 개원했다. 46년간 단 하루도 쉬지 않은 한국생명의전화에 지금까지 걸려온 상담 전화는 100만 통이 넘는다. 2011년부터는 19개 한강다리에 ‘SOS생명의 전화’ 74대를 운영하고 있다.


● “재난 뒤 자살률 급증…사전예방 철저해야”

하상훈 한국생명의전화 원장이 한강다리에 설치된 ‘SOS생명의전화’를 본 떠 만든 모형 전화기를 들어보이고 있다. 하 원장은 “누구라도 이 수화기를 들기만 하면 실제 자살 위기상황이 발생하더라도 3분 만에 119구급대가 출동해 99.9% 생명을 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9월 10일 ‘세계 자살예방의 날’을 앞둔 7일 서울 성북구 한국생명의전화에서 만난 하상훈 한국생명의전화 원장은 자살예방 캠페인 준비에 한창이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자살예방협회(IASP)는 200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세계 자살예방의 날을 제정했다. 당시 WHO와 IASP가 내걸었던 슬로건은 ‘자살이라는 킬러와의 전쟁’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자살률 1위이자 하루에 36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 한국은 이 전쟁의 최전선인 셈이다.


그래픽=안지현 anji1227@donga.com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에는 ‘코로나 블루’로 자살률이 더 증가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사실 정반대다. 지난해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자살자 수는 1만3195명으로 2019년에 비해 604명이 줄었다. 하 원장은 “동일본 대지진 등 큰 재난 직후 오히려 자살률이 감소하는 사례가 세계적으로 많이 있다”며 “나만 괴로운 게 아니라 모두가 고통 받는다고 느끼면서 일종의 사회적 응집력과 유대감이 생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는 자살 위험이 잠시 유예된 것일 뿐 일상 회복 이후에 자살률이 급증할 수도 있다. 2020년 전체 자살자 수는 줄었지만 10~30대 젊은 세대의 자살이 증가한 것은 큰 위험 신호다. 특히 10대, 20대 자살률은 전년 대비 각각 9.4%, 12.8% 증가했다. 하 원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활동이 위축되면서 주변과 단절되고 학업·취업 스트레스가 극대화됐을 수 있다”며 “이들 세대의 절망감을 사전에 사회공동체에서 보듬어야 팬데믹 이후를 대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사전예방 못지않게 중요한 사후예방

그래픽=안지현 anji1227@donga.com

지난해 한강다리에 설치된 SOS생명의전화를 통해 119구급대가 출동해 구조에 성공한 것은 202건이다. 대부분이 자살 시도를 하기 전 육상에서 구조됐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다. 자살 시도자가 자살을 재시도할 확률은 일반인보다 약 40배 높다. 응급실에 실려 온 경우에 한해 병원의 사후 관리가 이뤄지고 있어 병원 밖에 있는 이들은 사각지대에 있다.

사회적으로는 자살 유가족이라는 낙인으로, 개인적으로는 가족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힘들어하는 남겨진 가족들도 자살 고위험군이다. 하 원장은 “자살 시도자 수는 자살자의 10~20배 수준이고, 유족 등 자살 고위험군으로 분류되는 인원은 자살자 1명 당 6명 수준”이라며 “이들을 합하면 최소 20만 명 이상이 심각한 자살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우리나라는 자살 위기 상황에서 즉시 개입하는 시스템은 굉장히 잘 돼 있지만 사전·사후예방 조치는 더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 원장은 △사전 예방 △위기 개입 △사후 예방으로 이어지는 자살예방 3스텝을 잘 세우기 위한 요소로 정부 부처 간 협업과 민관 협력을 꼽았다. 하 원장은 “자살은 우울증 같은 개인적 이유부터 취업, 학교·가정폭력, 빈곤, 궁극적으로는 공동체 붕괴 등 다양한 원인이 있기 때문에 범부처 협업을 이끌어 내는 대통령 직속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고 했다. 또 “미국의 ‘국가자살예방 생명의 전화’처럼 정부가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봉사 하는 시민단체의 풀뿌리 조직을 이용하면 민간의 경험과 노하우를 이용할 수 있다”며 “시민단체, 종교계, 각종 협회 등과 손잡으면 현재 정부가 관련 인력을 직접 고용하는 시스템보다 예산도 훨씬 절감할 수 있다”고 했다.


● 명절에 고립된 주변 살펴야…“라떼는”도 금지

‘사람사랑 생명사랑 밤길걷기’는 일반 참가자, 유가족 등이 캄캄한 밤길을 날이 샐 때까지 함께 걸으며 어둠을 헤치고 희망으로 나가자는 의미를 다지는 자살예방 캠페인이다. 한국생명의전화 홈페이지

혼자 외로움과 싸우는 이들에게 명절은 더 큰 고립감과 절망감을 느낄 수 있는 시기다. 특히 가족과 떨어져 사는 홀몸노인 등 1인 가구의 경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쉽다. 하 원장은 “이럴 때일수록 누군가와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 중요하다”며 “주변에 외로움을 호소하는 이가 있다면 직접 찾아가는 것이 가장 좋고, 전화, 문자로라도 안부를 묻는 것이 좋다”고 했다.

학업, 취업으로 힘겨워 하는 자녀들에게 “라떼는(나 때는) 안 그랬다” “정신력이 약해서 그렇다”는 등의 잔소리도 금물이다. 하 원장은 “작은 스트레스에도 크게 어려움을 겪는 이들도 많다”며 “‘요즘 애들은 나약하다’고 일반화하며 충고하고 가르치려하기 보단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려고 애쓰면서 소통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하 원장은 “누구라도 살면서 힘든 생각이 들 때 자살예방상담전화(1393), 정신건강복지센터(1577-0199), 생명의전화(1588-9191) 등 조금만 손을 내밀면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