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상훈 한국생명의전화 원장 한국생명의전화, 46년간 24시간 운영 자살·심리상담 전화 100만 통 기록 9월 10일 ‘세계 자살예방의 날’ 제정 “자살예방도 ‘포스트코로나’ 대비 필수 명절에 고립감 더 깊어져…주변 돌아봐야”
정신 건강, 정서 문제 등 마음(心) 깊은 곳(深)에 있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어느 늦은 밤 한 교회 사무실 전화기가 울렸다.
혼자 설교 준비를 하던 목사가 수화기를 들자 한 청년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년은 “큰 빚을 지게 돼 깊은 절망에 빠졌고, 사는 것이 괴롭다”고 토로했다. 목사는 안타까워하며 청년에게 위로와 조언을 건네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청년은 가스 찬 방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채 발견됐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새벽 2시, 교회로 또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이번엔 한 여성이 울먹이며 도움을 청했다. 목사는 앞서 떠난 청년을 떠올리며 1시간 동안 이야기를 경청하고 깊이 공감해줬다. 그 여성은 다음날 교회에 찾아와 목사에게 “살아갈 힘과 용기를 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1962년 ‘생명의 전화(Life Line)’의 효시가 된 호주 시드니 중앙감리교회의 알렌 워커 목사 이야기다. 알렌 워커 목사는 전화상담으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고 확신하고 24시간 4교대로 돌아가는 상담센터를 설립했다. 그로부터 14년 뒤인 1976년 9월 한국생명의전화가 개원했다. 46년간 단 하루도 쉬지 않은 한국생명의전화에 지금까지 걸려온 상담 전화는 100만 통이 넘는다. 2011년부터는 19개 한강다리에 ‘SOS생명의 전화’ 74대를 운영하고 있다.
● “재난 뒤 자살률 급증…사전예방 철저해야”
하상훈 한국생명의전화 원장이 한강다리에 설치된 ‘SOS생명의전화’를 본 떠 만든 모형 전화기를 들어보이고 있다. 하 원장은 “누구라도 이 수화기를 들기만 하면 실제 자살 위기상황이 발생하더라도 3분 만에 119구급대가 출동해 99.9% 생명을 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그래픽=안지현 anji1227@donga.com
하지만 이는 자살 위험이 잠시 유예된 것일 뿐 일상 회복 이후에 자살률이 급증할 수도 있다. 2020년 전체 자살자 수는 줄었지만 10~30대 젊은 세대의 자살이 증가한 것은 큰 위험 신호다. 특히 10대, 20대 자살률은 전년 대비 각각 9.4%, 12.8% 증가했다. 하 원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활동이 위축되면서 주변과 단절되고 학업·취업 스트레스가 극대화됐을 수 있다”며 “이들 세대의 절망감을 사전에 사회공동체에서 보듬어야 팬데믹 이후를 대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사전예방 못지않게 중요한 사후예방
그래픽=안지현 anji1227@donga.com
사회적으로는 자살 유가족이라는 낙인으로, 개인적으로는 가족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힘들어하는 남겨진 가족들도 자살 고위험군이다. 하 원장은 “자살 시도자 수는 자살자의 10~20배 수준이고, 유족 등 자살 고위험군으로 분류되는 인원은 자살자 1명 당 6명 수준”이라며 “이들을 합하면 최소 20만 명 이상이 심각한 자살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우리나라는 자살 위기 상황에서 즉시 개입하는 시스템은 굉장히 잘 돼 있지만 사전·사후예방 조치는 더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명절에 고립된 주변 살펴야…“라떼는”도 금지
‘사람사랑 생명사랑 밤길걷기’는 일반 참가자, 유가족 등이 캄캄한 밤길을 날이 샐 때까지 함께 걸으며 어둠을 헤치고 희망으로 나가자는 의미를 다지는 자살예방 캠페인이다. 한국생명의전화 홈페이지
학업, 취업으로 힘겨워 하는 자녀들에게 “라떼는(나 때는) 안 그랬다” “정신력이 약해서 그렇다”는 등의 잔소리도 금물이다. 하 원장은 “작은 스트레스에도 크게 어려움을 겪는 이들도 많다”며 “‘요즘 애들은 나약하다’고 일반화하며 충고하고 가르치려하기 보단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려고 애쓰면서 소통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하 원장은 “누구라도 살면서 힘든 생각이 들 때 자살예방상담전화(1393), 정신건강복지센터(1577-0199), 생명의전화(1588-9191) 등 조금만 손을 내밀면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