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이면도로 골라 고의 접촉 사고 “절차 복잡하니 10만 원 합의하자” 요청 ’사고 냈다‘ 생각에 경황없는 피해자들 노려 “작은 사고도 경찰 신고, 블랙박스 설치 도움”
A 씨가 이른바 ’손목 치기‘ 수범으로 고의 사고를 내는 장면. 서울 용산경찰서 제공
이번에도 차량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법한 비좁은 이면도로를 찾은 A 씨. 멀리서 A 씨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는 차를 우두커니 지켜봅니다. 운전자가 도로 위 A 씨를 발견하고 핸들을 꺾어 옆으로 비껴가는 찰나, A 씨는 자기 발을 슬그머니 뒷바퀴 앞으로 집어넣습니다. A 씨는 고의로 깔리게 한 발을 절뚝이는 척하며 운전자에게 항의합니다. “제 발을 밟고 지나가셨어요.”
지나가는 차량에 고의로 손, 팔, 발을 대는 이른바 ’손목치기‘ 수법 등으로 보험금을 타낸 A 씨가 최근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그는 지난해 4월부터 지난달까지 서울, 경기 일대에서 51건의 고의 교통사고를 일으켰는데 보험금, 합의금 등으로 약 3300만 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 A씨 “그냥 10만 원에 합의합시다”
A 씨가 범행을 저지른 서울 용산구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 인근 골목길 모습. A 씨는 이처럼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않은 좁은 골목길을 지나가는 차량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또 다른 현장은 서울 용산구 후암동이나 해방촌 일대. 경찰에 따르면 이곳 근방에 거주하는 A 씨는 자주 지나다니던 이곳 일대 도로 상황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A 씨는 용산구 일대 주택가, 상가 등이 밀집한 비좁은 이면도로를 주요 범행 장소로 택했습니다.
범행 패턴은 유사했습니다. 지나는 차량에 고의로 슬쩍 신체 부위를 충돌시킨 뒤 운전자를 쫓아가 멈춰 세웁니다. “저를 치고 지나가셨어요.” 운전자들이 당황한 사이 A 씨는 “보험사에 대인 사고를 접수하면 보통 전치 2주는 나올 테고 150만 원에서 300만 원까지도 나온다”고 덧붙입니다.
운전자의 머릿속은 복잡해집니다. 그 사이 A 씨는 “크게 다친 것 같진 않다”며 “5만~10만 원만 받고 끝내겠다”거나 “치료비 명목 5만 원만 달라”며 합의를 제안합니다. 경찰 조사 결과 대부분 피해자는 이 합의를 받아들였고 A 씨는 돈을 챙긴 뒤 현장을 떠났습니다.
A 씨 고의 사고로 가장 많은 액수를 챙긴 범행은 지난해 6월 서울 중구 신당동에서 발생했습니다. A 씨는 진로 변경하는 차에 자신의 차를 고의로 부딪치게 한 뒤 보험금 약 700만 원을 챙겼다고 합니다.
A 씨의 또 다른 범행 장소였던 서울 용산구 해방촌 인근 골목길 모습.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 피해자들 “’사람 쳤다‘ 생각에 정신없어”
“안전 운전한 것 같은데 이상하다.” “A 씨가 서있는 걸 보고 피해 운전했다.” “길이 좁아서 서행하며 지나갔다.”더구나 업무용 차량을 운전하던 피해자들은 “일 때문에 다른 곳으로 서둘러 이동해야 했다”며 “복잡한 사고 처리 절차를 밟기보단 (A 씨가 요청한 대로) 5만 원에 합의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고 밝혔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A 씨가 일부러 업무 차량 등을 노렸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습니다.
● “하루에만 5건 인지, 누구라도 의심했을 것”
수십 건의 사기 행각을 벌였던 A 씨의 검거에는 서울 용산경찰서 용중지구대 권철희 경사, 조계현 경장의 공이 컸습니다. 권 경사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하루에만 알게 된 비슷한 사건이 5건이었다. 어느 경찰관이든 범행을 의심했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지난달 17일 권 경사는 순찰을 마치고 순찰차에서 내리는 순간 지구대를 방문한 민원인 한 명을 만났습니다. 이 민원인은 “고의 교통사고 피해를 본 것 같다”고 진술했다. 이를 메모하는 사이 지구대에 추가로 신고가 접수됐는데 놀랍게도 이 민원인이 말하는 내용과 많은 게 일치했습니다. 이 민원인은 “며칠 전에도 근처 가게에 물건을 납품하시는 분이 A 씨에게 합의금을 건네는 걸 봤다”고 추가로 다른 사건까지 알렸습니다.
권 경사와 조 경장은 신고 장소 일대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뒤 이들은 현장에서 또 다른 피해자를 상대로 합의금을 요구하고 있던 A 씨를 발견했습니다. 인근 폐쇄회로(CC)TV를 확인하고 범행을 의심한 권 경사는 A 씨에게 경찰서 임의 동행을 요청했습니다.
A 씨는 처음에는 “떳떳하다”며 조사에 순순히 응하는가 싶더니, 순찰차 앞에 도착하자 “나중에 조사받겠다”며 자리를 떠났습니다. A 씨는 이날 오후 한 번 더 범행을 저지르는 ’대담함‘도 보였습니다. 하루에만 A 씨의 범행 의심 신고가 5건에 달하자 경찰은 본격 수사에 착수해 지난달 29일 A 씨를 검거했습니다. 그는 “범죄 수익은 대부분 도박, 유흥비로 썼다”고 밝혔습니다. A 씨의 뚜렷한 직업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A 씨(파란색 원)가 범행을 위해 피해 차량에 다가가는 장면이 차량 블랙박스에 찍혔다. 서울 금천경찰서 제공
● 경찰 신고가 원칙, 블랙박스 영상 증거도 결정적
A 씨가 고의 사고 합의금을 요구하다 미수에 그친 건도 있었습니다. 이 경우 피해자들은 “경찰에 일단 신고하고 사건 경위를 따져보자”고 했다고 합니다. A 씨는 경찰이 현장에 출동할 상황이 되면 어느새 조용히 현장을 떠났다고 합니다.피해를 막기 위해 경찰, 보험사 관계자들은 “일단 경찰 신고가 원칙”이라고 강조합니다. 경찰 관계자는 “사고가 나면 대부분 당황하면서 빨리 현장 상황부터 마무리하느라 범행을 의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합니다. 또 “사고 처리 절차와 비용을 생각하면 5만~10만 원이 큰 금액은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으나, 경찰에 신고해야 사기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여러 교통 보험사기를 조사한 한 보험사 관계자는 “단순 합의로 끝내는 게 목적인 손목치기는 부상 위험이 적은 서행 일방통행로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다”며 “블랙박스 영상이 주요 증거로 활용되기 때문에 블랙박스 설치가 필수”라고 답합니다.
A 씨의 범행 당시 장면이 찍힌 서울 강남구 한 골목길 CCTV 영상. 서울 강남경찰서 제공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