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집안의 딸’ 대학 시절 마리화나 합법화·왕실 폐지 주장 졸업 직후 1997년 영국 보수당 입당 경기 침체·잇따른 파업 등 취임 첫 날 부터 위기 직면 ‘기회주의자’ 꼬리표 떼고 반등 가능성 주목
올 4월 외무장관이던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내각 회의를 마치고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를 나서고 있다. 그가 입은 큰 리본 달린 흰색 블라우스는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전 총리의 트레이드마크를 연상케 한다. 6일(현지 시간) 취임한 트러스는 감세, 작은 정부, 대중국 및 대러시아 강경 정책 등을 앞세우며 대처 전 총리와 비슷한 행보를 드러냈다. 런던=AP 뉴시스
“매기(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 별명)는 떠나라! 매기는 떠나라! 매기는 떠나라!”
마가렛 대처(1925~2013) 전 총리가 집권하기 4년 전인 1975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여자 아이가 태어납니다. 아이 아버지는 강성 좌파 수학교수였고 어머니는 반핵(反核) 활동 경력이 있는 간호사였습니다. 이 아이는 성인이 된 후 가족에 대해 종종 ‘노동당 중에서도 왼쪽’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반(反)대처’ 가문의 딸, 보수 심장에 서다
1990년대 중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는 배에 탄 20대 중반 리즈 트러스(오른쪽). 대학 시절 진보 활동을 했지만 그는 졸업 직후 1997년 보수당에 가입한다. 사진 출처 리즈 트러스 인스타그램.
그는 졸업 직후인 1997년 보수당에 가입합니다. 그의 ‘변심’은 지인들에게 매우 충격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대학 동료로부터 “네 딸이 ‘보수 꼴통’이 된 것을 봤다”는 e메일도 받았다고 합니다. 트러스는 영국 일간 ‘더타임스’ 인터뷰에서는 “어머니는 정치적 견해를 바꾸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표를 던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내게 투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의 낙선 후 2010년 트러스는 사우스웨스트노퍽 지역 하원의원으로 의회에 입성합니다. 왕실 폐지를 주장했던 그는 12년 후 스코틀랜드 밸모럴 성에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알현하며 총리직에 공식 임명됩니다. 트러스는 엘리자베스 2세의 15번째이자 마지막 총리입니다.
철의 여인 아닌 ‘철의 풍향계’… “치즈는 직접 길러라”
총리 취임 이튿날인 7일(현지 시간) 영국 맨체스터 슈퍼마켓 신문 가판대에 리즈 트러스 56대 총리 취임을 알리는 신문들이 놓여 있다. '더 선' 1면 헤드라인은 '안녕 리즈(Hello Liz)'다. 맨체스터=AP 뉴시스
프랑스 경제신문 레 제코(Les Echos)는 이런 번복을 빗대 “철의 여인이 아닌 철의 풍향계(une girouette de fer)”라고 트러스 총리를 비꼬았습니다. 트러스는 보리스 존슨 전 총리 내각 외무장관으로 부임해서는 열성적인 브렉시트 지지자로 활동합니다.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며 EU 밖 새로운 시장 탐색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올 6월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 참석한 리즈 트러스 당시 외무장관이 회의장으로 향하고 있다. 마드리드=AP 뉴시스
영국 일간 가디언(The Guardian)
“별 생각 없는, 텅 빈, 진부한(Facile, empty and cliched)”
영국 대표적 진보 성향 일간 ‘가디언’ 평가는 냉혹합니다. 사이먼 젠킨스 가디언 칼럼리스트는 트러스 취임 후 첫 주에 대해 ‘별 생각 없는, 텅 빈, 진부한’이라고 표현합니다. 칼럼이 지적하는 부분은 에너지 정책입니다. 트러스는 6일 취임 첫 연설에서 1500억 파운드(약 238조 원) 이상의 대규모 에너지 지원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비용은 국채를 발행해 충당할 예정입니다. 선거 기간 외치던 ‘보조금 불가(no handouts)’를 24시간 만에 철회한 셈입니다.
6일 리즈 트러스 총리가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 앞에서 취임 연설을 하고 있다. 그는 이날 약 1500억 파운드 규모 에너지 지원 정책을 발표했다. 런던=AP 뉴시스
트러스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도 가디언은 “이제는 트러스가 장미빛 색안경을 벗고 현실 도피에서 돌아올 때”라고 비난합니다. 최근 “영국 노동자들은 더 많이 일해야 한다(need more graft)”라는 트러스 과거 발언이 공개됐습니다. 그가 공저자인 책에서는 “영국 노동자는 최악의 게으름뱅이(idler)”라는 표현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가디언은 트러스에게 ‘근면성실로 영국 경제 위기가 자연스레 해소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라’고 경고합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리즈 트러스는 단지 ‘괜찮기’ 위해 '훌륭해야' 한다
(Liz Truss will have to be great just to be good)”
“경기 침체, 인플레이션, 파운드화 추락, 끊이지 않는 파업, 악화되는 공공 서비스, 높은 금리, 바닥난 국고. 영국 경제에 대한 자신감은 잠재적으로 위기에 놓였고 정당은 분열적이며 반항적이다.”
FT는 에너지 지원 정책이 첫 번째 시험대라고 말합니다.
“(에너지 정책을) 망친다면 리더십은 물론 (보수당) 정권 전체가 다시는 회복되지 못할 수도 있다. … 유일한 희망은 노동당 대안에 유권자들이 확신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영국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본인의 치즈는 직접 기르세요(Grow your own cheese)”
트러스에게는 악몽 같은 하루가 있었습니다. 2014년 보수당 회의 때입니다. 환경부 장관이던 트러스는 이렇게 연설합니다.
“우리는 전체 치즈 소비량 3분의 2를 수입합니다. 이것은 불명예(disgrace)입니다.”
그해 가을 중국과 협상을 앞둔 트러스는 영국산 돼지고기 수출길을 열어 거대한 중국 시장을 사로잡겠다는 야심을 펼칩니다. 그러나 연설은 뜻대로 흐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체 사과 3분의 2를 수입하고 있습니다. 배는 10분의 9를 수입하고, 치즈도 3분의 2를 수입합니다”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연설에 청중은 박수칠 타이밍마저 놓칩니다. 과장된 어투와 표정, 덜컥거리는 모습은 애석하게도 수많은 ‘굴욕 짤’을 탄생시켰습니다.
영국 언론은 트러스가 달변가는 아닌 점을 지적합니다. 화려한 언변을 자랑한 존슨 전 총리에 비해 트러스가 인기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도 여기서 나옵니다.
포퓰리스트, 극우파 등 취임 전부터 달린 꼬리표를 떼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영국을 트러스는 구해낼 수 있을까요? 그의 행보가 주목되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2세 전 영국 여왕베를린=AP 뉴시스
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