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의 ‘게와 가족’(1950년대). 이중섭의 은지화 속에는 계급도 없고 차별도 없다. 아이들과 물고기, 게들이 동급을 이뤄 함께 어울리며 끈과 같은 소도구로 연결돼 있다. 공동체 정신과 평화 정신, 범생명주의 가치관이 담겨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행복이 무엇인지 대향은 비로소 깨달았다오. 그것은… 천사처럼 훌륭한 남덕 씨를 진정한 아내로 삼아 사랑의 결정체 태현이, 태성이 두 아이를 데리고… 끝없는 감격 속에서 크게 숨을 쉬고, 그림으로 표현해내면서… 화공 대향 현처 남덕이 하나로 녹아 진실하고 생생하게 살아가는 것이라오. 나만의 훌륭하고 사랑스럽고 소중한 아내, 나의 남덕 씨, 힘을 냅시다. 남덕 대향의 결합은… 우주의 의지이며 온갖 생명을 기름지게 하는 올바른 삶의 지표가 될 것이오. 생명의 환희가 솟구치는 샘이며 별처럼 끝도 없이 신비하며 태양처럼 밝은 빛이라오. 더, 더 서로 사랑하며 뜨겁고 격렬하게 하나로 녹아야 하오. 나의 멋진 천사 남덕 씨와 화공 대향의 만남은 그 자체로 신비이며 참으로 신기한 기적이라오.”
대향(大鄕) 이중섭이 두 아들과 함께 일본에서 살고 있는 아내(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에게 1953년 9월에 보낸 편지이다. 전쟁은 이들 가족의 삶을 깼고, ‘화공(畵工) 대향’은 ‘멋진 천사’를 그리워하면서 어렵게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던 시절의 연문(戀文)이다. 이중섭의 아내 사랑. 이들의 사랑은 인류사의 모든 사랑을 합쳐도 비교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중섭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1954년). 이중섭은 일본에 사는 아내와 두 아들을 그리워하다가 불과 40세에 숨을 거뒀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은지화는 담뱃갑을 감싼 종이다. 전쟁과 전후 복구 시기의 물자난은 화가로 하여금 그림 재료를 쉽게 확보할 수 없게 했다. 그래서 이중섭 그림의 대부분은 작은 종이에 그린 것이고, 게다가 담뱃갑의 은지에 상당수 그림을 그려야 했다. 엽서화만 해도 이중섭 특유의 필치는 아직 숙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은지화는 무엇보다 유려하면서도 일필휘지의 역동감 있는 선묘(線描)가 특징을 이룬다. 못 같은 뾰족한 도구로 음각하여 검은 물감을 집어넣은 그림이다. 마치 청자의 상감기법을 응용한 것 같다. 손바닥만 한 작은 크기에 이중섭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았다. 소재상의 특징은 무엇보다 아이들의 세계를 집약했다. 벌거벗고 엉켜 있는 천진무구한 동심의 아이들. 그들은 어떤 격식도 없는 자유, 그 자체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아이들의 세계는 이중섭의 대향, 바로 커다란 마을, 즉 이중섭의 이상향이다. 거기에는 계급도 없고 차별도 없다. 그래서 물고기나 게들도 동급을 이뤄 함께 어울리고 있다. 바로 범생명주의의 도해이다. 이중섭 그림의 소재들은 박수근과 달리 원형 구도를 이루면서 함께 공동체 정신을 담았다. 이들은 끈과 같은 소도구로 연결돼 인연설을 입증하기도 한다. 네가 있어 내가 있고, 내가 있어 네가 있다. 바로 전쟁기에 피어난 이중섭의 평화 정신이다.
이중섭의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1954년). 이중섭의 인간관계는 ‘축복’에 가까웠고, 이것이 가족애, 인류애로 이어졌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