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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마다 확신 준 퀸’… 나라를 하나로 묶은 겸손-탈권위 리더십

입력 | 2022-09-13 03:00:00

[엘리자베스 2세 英 여왕 서거]
자원입대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군주제 찬반 양측서 모두 존경받아
阿 가나 대통령에 “우리 춤춰요” 제안… 아일랜드 찾아 화해의 계기 마련도
다큐 ‘로열패밀리’로 왕실 일상 공개… 前총리들 “여왕엔 솔직할 수 있었다”




“여왕은 영국이 어려울 때마다 확신을 주는 존재(assuring presence)였다.”

9일(현지 시간) 서거한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해 영국 지역신문 기자인 멜라니 맥도널드 씨는 동아일보 기자를 만나 “여왕은 영국이라는 한 국가가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준 존재였다”며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영국인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없는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 그는 70년 재위 기간 동안 영국 왕실이 과거처럼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국민 앞에 개방적이고 겸손한 태도를 유지해 왔다고 외신들이 평가했다. 미국 ABC 방송은 “겸손함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진짜 강점”이라고 했다. 이런 성품을 바탕으로 영국 국민에게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리더십에 대한 믿음을 주면서 영국을 지탱한 구심점이 됐다는 것이다.

2007년 11월 6일 런던에서 열리는 의회 개회식에 참석하기 위해 버킹엄 궁전을 떠나고 있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뉴시스

실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대해서는 군주제 반대론자들도 존중을 표시할 때가 많다. 6월 여왕 즉위 70주년 행사에서 본보 기자와 만난 런던 시민 테일러 씨는 “왕실이 아닌 여왕이 국민의 구심점이다. 100세까지 군주 자리를 지켜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서 여왕은 “(국민이) 보여준 호의에 힘을 얻었다”며 70년 재위의 공을 국민에게 돌렸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는 “여왕은 군주제 지지자와 군주제 철폐를 요구하는 공화주의자 양쪽에서 모두 존경받았다”고 평가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격변하는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존재였다”고 했다.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는 “바위처럼 든든한 존재”라고 여왕을 기렸다. 정치가 분열을 부추기고 위기를 극복할 해답을 제시하는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 한국에 여왕의 리더십이 주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 군에 자원입대 ‘노블레스 오블리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즉위 전 스무 살 되던 1945년 아버지 조지 6세에게 “조국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밝힌 뒤 영국 여자국방군에 자원입대했다. 군번 ‘230873’을 달고 군용트럭 운전사로 복무했다.

“믿음을 얻으려면 (자신을) 보여야 한다.”

왕실이 국민 위에 군림할 수 없다고 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969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다큐멘터리 ‘로열패밀리’를 통해 왕실의 일상을 소탈하게 보여주며 군주제에 비판적이던 영국 국민의 인식을 바꾸려 했다. 2012년 런던 여름올림픽에서 ‘본드걸’로 영상에 출연하거나 올해 재위 70주년 기념식 영상에서 영국의 ‘국민 캐릭터’인 곰 인형 패딩턴 베어와 함께 출연해 화제가 됐다.

그러면서도 정치 현안에 대해서는 공개적인 발언을 삼가며 ‘정치 불개입’ 전통을 고수했다. 특히 즉위 직후부터 시대 변화에 맞게 고압적인 태도 대신 탈권위적이고 개방적인 발언과 행보를 보이며 주목받았다.

9일(현지시간) 엘리자베스 여왕의 추모사진이 런던의 버스 정류장에 설치됐다. 런던=AP/뉴시스


1961년 가나를 방문해 ‘아프리카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던 콰메 은크루마 초대 대통령과 춤을 추던 모습이 가장 대표적이다. 테러 우려에도 가나를 방문한 여왕은 카메라 앞에서 은크루마 대통령에게 춤을 먼저 제안했다. 군주인 백인 여성과 탈식민지 운동을 주도한 흑인 남성이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장면은 전 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2011년 여왕이 100년 만에 아일랜드를 방문한 것이 1922년 아일랜드가 독립한 뒤 양국 간 깊은 갈등을 조금이나마 씻어내는 화해의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당시 BBC는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에 빗대 “여왕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두 나라의 역사에는 위대한 순간”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 英 총리들도 속내 보이며 절대 신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삼가면서도 영국 총리들의 고민을 경청했다. 1992년 그는 한 다큐멘터리에서 “총리들은 내게 속내를 보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털어놓곤 한다”며 “일종의 스펀지가 된 듯한 느낌을 받는데, 오히려 좋다”고 말했다. 존 메이저 전 영국 총리는 “여왕에게는 심지어 무분별할 만큼 완전히 솔직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런던=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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